울산시 무형문화재 1호 장도장
군사기지였던 울산의 역사 기반
조선때부터 이어져온 문화유산
맥 끊길 위기속 시 기록화 나서
기원·전승과정·활용 등 총망라

▲ 요즘은 전통의 울산은장도가 현대적 감각의 목걸이 펜던트로도 제작되고 있다. 장추남 장인의 ‘목걸이 은장도’.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1호 장도장은 울산광역시 승격 후 첫 번째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병영장도의 명맥을 이어 지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활동한 고(故) 임원중 장인과 2019년 2대 보유자로 인정된 장추남 장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2020년 12월, 울산박물관 ‘技(기)와 藝(예)를 잇다-울산무형문화재’ 전시장에서

#‘철에서 태어난 은장도’를 주제로 울산의 은장도가 소개됐다. 금과 구리의 합금인 오동에 순은으로 무늬를 넣는 오동상감기이다. 이 기법은 울산 병영 장도에만 전해오는 특별한 것으로, 상감 장식 특유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2020년 12월, 달천철장 관리시설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1호 장도장 사진전’에서

울산 장도장(粧刀匠)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총 7건의 시 무형문화재 중 제1호 장도장 기록화 사업이 울산시의 지역문화재 연구용역사업으로 진행된다.

울산 장도장은 조선조 군사도시 울산의 역사에 기반한 전통문화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면면히 지속돼 온 울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다만 장인들의 사망과 부상으로 맥이 끊길 위기에 놓여있어 이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 시급하던 차에 다수의 시 무형문화재 중 제1호부터 기록화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울산은장도의 기원과 전승과정, 현대적 활용사례 등이 총망라 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울산의 은장도는 어떻게 유명하게 된 걸까.

그 연원은 조선시대 경상좌병영이 울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군수 공방이 많았고, 우수한 장인도 많았다. 울산의 달천산은 예로부터 철의 산지로 유명했고, 조선시대 군사기지인 병영에는 야장들이 모여 살며 그 철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대원군 시대에 병영이 폐영되면서 무기를 만들던 장인들은 숟가락과 밥그릇, 담뱃대 등 민간의 생필품과 휴대용품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병영에는 72곳의 칼 공방에 350여 명의 장인이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들이 생산하던 수제품은 점점 찾는 이가 줄어들었다. 그나마 뒷심을 발휘하며 꽤 오랫동안 주문이 들어 온 품목이 있었으니, 호신용 또는 장신구로 사용하던 은장도였다. 사대부 집안 규수들의 필수품이자, 정절의 상징으로 혼수품으로도 각광받았다.

1960년대 이후 울산 병영의 은장도는 임원중 장인이 세운 고려민예사, 허균 장인이 세운 신라민예사, 그리고 장추남 장인과 그 형님 장정환 장인이 세운 고정민예사 세 곳이 맥을 이었다. 임원중 장인은 1997년 울산시 제1호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울산 최초의 장도장이다. 2004년 그가 작고한 이후 아들 임동훈 전수조교가 뒤를 잇고 있다. 허균 장인은 울산 은장도의 대표적 기법 오동상감장도를 본격적으로 만든 사람이라 한다. 그가 58세에 작고한 이래 아들 허명이 공방을 이어 받았는데, 현재는 장도 만드는 일을 그만 둔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올해 아흔 한 살이 된, 시 무형문화재 제1호 장추남 장도장은 원래 그의 형 장정환 장인과 함께 은장도와 담뱃대를 만들었다. 형이 죽은 후에는 아들 정경천 전수자와 함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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