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근대사 흔적 간직한 건물
중구, 공원 이전 등 추진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재활용에 한계
늦어도 내달초 헐릴 가능성 커

▲ 사진1

울산시 중구 우정동 우정2공영주차장 일원은 지역주택조합의 재개발사업이 한창이다. 오래된 가옥이 많았던 이 마을이 최근 대부분 뜯겨나갔다. 그 가운데 기와집 2채가 남아 있다. 지어진 지 100년 전후의 한옥이다. 두 집 사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는 흙담도 그대로다. 사람들은 읍성길의 흔적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것으로 알려진 옛 기와 조각도 흩어져 있다.

구한말 이후 울산근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이들 한옥을 재활용하기 위해 중구는 그동안 동분서주 했다. 하지만 뾰족한 해결책 없이 반년이 흘러가 버렸다. 아무리 늦춰도 다음달 초에는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옥이 헐리게 된다. 이들 가옥을 역사공원 및 마을공원으로 옮겨서 다시 세우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 사진2

첫번째 한옥(사진1)은 고 김창식(2018년 별세) 옹이 살았던 곳이다. 고인은 강정마을(우정동) 천석꾼 후손으로 서울에서 유학을 했던, 그 시절 울산의 마지막 부자 세대다. 그의 할아버지 김한경(金翰經)이 살림을 일구어 천석꾼이 됐다고 한다. 1960년대 초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울산에는 특별한 산업시설이 없어 부자들의 재산이 대부분 전답이었다. 논이 많다보니 벼를 저장하는 창고도 두동과 덕하에 있었고, 지금의 한옥 집에도 200가마니의 쌀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따로 있었다.

이 한옥을 지을 당시의 일은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가 본보에 연재한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2018년 2월26일자 9면)에서도 확인된다. ‘집은 춘양목으로 강원도에서 목재를 배로 가져와 장생포에 하역한 후 우정동까지 가져왔는데 이때 소달구지 20여대가 동원됐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가 적십자 회비를 많이 거두기 위해 일정액 이상의 회비를 내는 집에 아름다운 문양의 문패를 달아주었다. 당시 울산읍내에서 이런 문패를 달았던 집은 만석꾼 김좌성과 고인의 집 뿐이었다.

▲ 중구 우정동 재개발지구의 100년 된 기와집(사진1,사진2)과 흙담(사진3). 울산 중구가 이를 이전해서 재활용하려 했으나 예산확보 실패로 난항을 겪고있다.

한옥의 내부는 새하얀 회벽과 서까래, 마루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대들보부터 각종 기둥까지 전통 그대로의 방식으로 집을 올렸다. 나무와 나무를 고정하는데 쇠못을 박지않고 구멍을 파거나 요철을 만들어서 그대로 끼워맞추는 방식으로 지은 것이다.

김옹의 집과 흙담을 사이에 두고 또 한 채의 한옥(사진2)이 서 있다. 지번으로는 ‘우정동 258-1’이다. 수도와 전기가 모두 끊긴 그 집에는 옛 주인이 아직도 매일 찾아와 하루를 보내고 돌아간다. 23일 취재진이 현장을 방문한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황정미씨는 “지붕 아래 대들보에서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데, 1932년에 지어졌다. 이를 증조부가 1950년대에 구입했다. 어린 시절을 이 곳에서 보냈고, 추억이 너무 많아서 허물어지기 전까지는 와 보려 한다. 건물 자체는 개조를 많이 했지만, 흙담, 지붕기와가 오래됐다고 들었다. 건물을 보존하려고 지난해 개인적으로 애를 써봤는데, 역부족이었다”고 토로했다.

중구는 한때 한옥을 이전해서 그대로 다시 짓는 방안을 고민했다. 소요예산은 약 5억원 정도로 예상됐다. 울산시에 2021년도 당초예산으로 이를 요청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시 역시 보건복지 예산확대 등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중구 관계자는 “재개발지구 내에 조성되는 공원에 한옥을 옮겨 세우는 방안을 고민했지만, 예산이 따라주지 않아 힘들 것 같다. 역사문화보존을 위한 기업 및 조합의 사회환원 외 현재까지는 다른 방도가 없는데,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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