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며 자연스레 떨어지는 기억력
잦은 단어·문법오류사태로 번지기도
의기소침 하기보다 코미디로 즐겨야

▲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만65세가 되면 보건소에서 무료로 폐렴백신을 놓아준다. 일생에 한번 맞으면 된단다. 백신을 맞은 후 사람에 따라 혹시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며 한 10분간 앉아 있다 가라고 한다. 그리하여 쉬고 있으려니, 그동안 잠시 치매진단을 받으면 어떠냐는 권유를 받는다. 담당직원 앞에 다소곳이 앉아 질문을 듣고 답을 하면 된다. 그가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인가요?”라고 묻는다. 내가 자신 있게 정확하게 답을 하니 “네. 참 잘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번엔 간단한 산수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100에서 7을 빼면 얼마죠?”라고 묻는다. “네, 93입니다.” “거기서 또 7빼면 얼마죠?” “86이요.” “또 7빼면요?” “79요.” 즉시 정답이 술술 나온다. 그는 더 이상 묻기를 중단하고, ‘뭐 하시던 분’이냐고 하더니 ‘치매하곤 거리가 멀다’며 기념품 하나 받아가란다. 그랬던 나다.

평생 들은 것 중 가장 웃겼던 조크 하나. 친구사이인 A, B, C 세 명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식사 도중 A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 다음 주 수요일 저녁 6시에 모이기로 한 약속, 잊지 마라!”고 하니 B, C는 “잊을 리가 있냐? 알고 있어.”라고 답했다. A가 C에게 말한다. “야, 너는 건망증이 심하니 수첩에다 좀 적어라!” 그러자 C는 수첩을 꺼내 또박또박 적었다. 이윽고, 저녁식사가 끝나고 헤어지면서 A가 B, C에게 “다음 주 수요일 저녁 6시 모임, 절대 잊지 마라!”고 다시금 확인했다. 그러자 C가 “잠깐 기다려봐”하고 수첩을 열더니 “어, 그날 나 이미 약속이 잡혀있는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10여 년 전 그 조크를 듣고 나는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다. 그랬던 나다.

15년 전쯤 되나? 어느 선배와 운동을 한 적이 있다. 운동이 끝난 후 테이블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는데 우리 옆으로 그 선배와 비슷한 연배의 한 사람이 지나간다. 선배와 그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손을 잡았다. 선배 왈, “야,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나?” 그 사람 왈, “그럼, 잘 지냈지. 근데 넌 서울 갔다더니 울산에 있네.” 선배가 “어, 서울엔 왔다 갔다 해. 근데 너 요전에 그 모임에 왜 안 나왔냐?”고 물었다. “무슨 모임?”, “S대 ○○과 모임 말이야.” “어? 나 S대 안 나왔는데….” “그러면 K고등학교 나왔냐?” “아니, 난 P고등학교 나왔는데….” “M초등학교 안 나오셨어요?” “아뇨, J초등학교 나왔는데요.” “아이고, 이거 큰 실례했습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하더니 헤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선배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도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전혀 계면쩍어하지도 않았다. ‘나이 들면 건망증도 건망증이지만 무안함조차 느끼지 않게 되는구나.’ 참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조차 했던 나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턴가 스스로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금고(金庫) 비밀번호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났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금고’라는 단어가 입에서 안 나온다. 그 대신 순간적으로 찾은 단어가 ‘돈 냉장고’였다. 친구에게 ‘휴대폰 충전중이니 충전케이블 빼고 휴대폰 좀 가져다주라’라는 문장이 복잡하게 생각되었는지, ‘휴대폰 꼬다리 빼고 가져다주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코미디는 이어진다. 자고 일어나니 아내가 묻는다. ‘잘 잤어?’ 나의 대답은 ‘안 잘 잤어.’ 단어의 앞뒤가 바뀌고, 생략하고, 난리다. 그래도 알아듣는 게 신기하다. 나뿐 아니다. 주위 친구들에게서도 이러한 언어구사의 난맥상(?)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기억이 잘 안 나는 단어는 주로 명사(名詞)다. 특히 사람이름 등 고유명사(固有名詞)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니 명사대신 ‘거시기, 그거, 저거, 그 친구’ 등 대명사(代名詞)의 사용빈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이다. 다행스런 것은,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낸 사이에선 표정만 보아도 뭘 말하려는 지를 대체로 알 수 있으니 대명사라도 집어넣으면 이해하는데 그닥 지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고를 돈 냉장고라, 이건 좀 심각한 거 아닌가? 기억력 감퇴를 걱정하다보니 자못 의기소침해진다. 달리 생각해보기로 했다. ‘순간적으로 누구도 알아들을 냉장고라는 기막힌 단어를 떠올렸으니, 흐음 역시 나는 천재야.’ 자신감이 붙고 즐겁기까지 하다. 그래, 어차피 단어오류, 문법오류사태는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테니 숫제 두뇌오작동을 코미디로 여기고 즐기자꾸나. 윤범상 울산대 명예교수·음악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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