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도 법적으로 보호받는 시대최근 잇따른 아동학대사건 보며인간의 이기심에 충격 금치못해

▲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머리가 희끗희끗해 지는 나이가 되면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자꾸 눈이 간다. 세상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듯한 할아버지의 표정이 부럽기도 하지만 사실은 할아버지의 걸음걸이를 저토록 당당하게 만드는 유모차 속의 아이가 궁금한 것이다. 지나가는 걸음을 멈추고 포대기 속 아이를 들여다보는 것도 약간은 민망하여 곁눈질로 쳐다보고 만다. 어쩌다 깨어있는 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치고 나면 발걸음이 가벼워 진다. 아이는 누구에게나 그런 존재다.

며칠 전에는 제법 근사한 유모차를 이끌고 아파트 마당을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나이 지긋한 신사를 만났다. 아내는 연신 유모차 안을 들여다보면서 휴대폰 카메라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이 유모차 속을 들여다보았다. 요람 속을 지키고 있는 주인공은 왕자 같은 아이가 아니라 한 마리 귀여운 하얀 강아지였다. 한순간 이건 뭐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얼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을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저들의 느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들었다. 저들에게 저 강아지는 목줄로 끌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소중한 존재인 모양이다. 아마 집에 들어가면 호칭도 엄마 아빠일 것이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동물도 이제는 그 권리를 인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해야 하는 시대다. 그래서 동물보호법에는 키우는 동물이 굶주리거나 영양이 결핍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고통 상해 등 질병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포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규정을 어기면 동물학대로 처벌받는다. 그래서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이제는 인간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애완동물이 아니고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로 그 존재적 위상이 격상된 것이다.

동물의 고통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공감하려 노력하는 사회는 인간이 만든 정신문화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구 위의 모든 동물들에게 일정한 윤리의식을 느끼는 인간의 정신에 경의를 표해야 마땅한 일이다. 짐승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있는 도덕 감정이라면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질 것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독일의 문호 안톤 슈냑은 아이의 울음 소리 조차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 자명한 도덕률이 번번이 무시되는 곳이 또한 우리사회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다. 말도 못하는 연약한 아이를 양부모가 함께 장이 파열될 때까지 폭행하였다고 한다. 어찌 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행 앞에서 아이는 세상을 포기 한 듯하였다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은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하게 만든다. 이런 참혹한 일을 어떤 이론과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것조차 안타까워하는 사람과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아이의 피부에 멍을 만들고 장기를 파열시키는 부모를 똑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것인가 의문스럽다.

여리고 약한 생명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보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특히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는 자기 자식이 아니라도 강한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도 어린 생명을 가장 잘 보호하고 키울 수 있는 힘을 본능 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달아 일어나는 어린 생명에 대한 학대 사건을 보면 인간의 본성인 측은지심이 이기적인 욕망에 밀려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인간의 본성도 어쩌면 그 사회의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상곤 전 울산시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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