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홍 사회부 기자

102번째 3·1절, 울산에는 독립운동 역사를 기념하는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졌다. 기념탑은 울산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됐다. 독립운동 상징물이 없던 울산에 유공자 후손들이 지난 1997년부터 기념탑 건립을 추진, 20여년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기념탑은 애국지사의 넋을 담아 ‘사람 인’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항일 독립유공자 102명의 이름과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새겨졌다. 항상 울산시민으로 애국지사하면 가슴이 아리는 분이 있다.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1884~1921년) 의사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시행한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재판소 판사로 발령이 났으나 그는 판사로서의 취임을 거부했다. 독립투사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박 의사는 독립투쟁 거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독립투사들과 공동출자해 상덕태상회라는 상점을 차렸다. 겉보기에는 곡물상이지만 독립운동기지였다. 그가 항일 독립운동단체 광복회를 결성한 것은 1915년 7월15일이었다. 국권회복의 힘은 강한 군사력이 바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고향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을 찾았다가 체포됐다.

대한광복회 부사령관 김좌진 장군이 그를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처형됐다. 광복 이후에도 그의 순국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친일 경찰이 광복후에도 경찰 고위직에 올라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을 다시 박해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예우도 부족했다.

박 의사는 광복 후 1963년 국가로부터 당시 가장 낮은 3등급 독립장을 받았다. 우역본은 지난 2019년 박 의사의 서훈 등급을 상향하자는 시민운동을 전개했지만 실패했다. 1963년 제정된 현행 상훈법 때문이었다. 법에는 서훈이 한번 확정되면 해당 인물의 공적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달라졌거나 심사과정에서 공적이 과대·저평가됐더라도 변경할 수 없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국가보훈처가 법의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박 의사의 서훈 등급 운동은 동력을 상실했다.

올해는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윤택한 삶도 없었다. 박 의사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의 대표 독립투사로 추켜세우는 것이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다. 법은 바꾸면 된다. 박 의사를 재조명하려는 의지의 문제다. 당리당략이나 정치적 계산이 아닌 진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세홍 사회부 기자 aqwe0812@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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