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번째 3·1절, 울산에는 독립운동 역사를 기념하는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졌다. 기념탑은 울산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됐다. 독립운동 상징물이 없던 울산에 유공자 후손들이 지난 1997년부터 기념탑 건립을 추진, 20여년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기념탑은 애국지사의 넋을 담아 ‘사람 인’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항일 독립유공자 102명의 이름과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새겨졌다. 항상 울산시민으로 애국지사하면 가슴이 아리는 분이 있다.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1884~1921년) 의사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시행한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재판소 판사로 발령이 났으나 그는 판사로서의 취임을 거부했다. 독립투사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박 의사는 독립투쟁 거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독립투사들과 공동출자해 상덕태상회라는 상점을 차렸다. 겉보기에는 곡물상이지만 독립운동기지였다. 그가 항일 독립운동단체 광복회를 결성한 것은 1915년 7월15일이었다. 국권회복의 힘은 강한 군사력이 바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등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고향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을 찾았다가 체포됐다.
대한광복회 부사령관 김좌진 장군이 그를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처형됐다. 광복 이후에도 그의 순국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친일 경찰이 광복후에도 경찰 고위직에 올라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을 다시 박해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예우도 부족했다.
박 의사는 광복 후 1963년 국가로부터 당시 가장 낮은 3등급 독립장을 받았다. 우역본은 지난 2019년 박 의사의 서훈 등급을 상향하자는 시민운동을 전개했지만 실패했다. 1963년 제정된 현행 상훈법 때문이었다. 법에는 서훈이 한번 확정되면 해당 인물의 공적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달라졌거나 심사과정에서 공적이 과대·저평가됐더라도 변경할 수 없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국가보훈처가 법의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박 의사의 서훈 등급 운동은 동력을 상실했다.
올해는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윤택한 삶도 없었다. 박 의사의 공적을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의 대표 독립투사로 추켜세우는 것이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이다. 법은 바꾸면 된다. 박 의사를 재조명하려는 의지의 문제다. 당리당략이나 정치적 계산이 아닌 진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세홍 사회부 기자 aqwe0812@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