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육 울산시 시민건강국장

태화강, 태화루에서 태화(太和)라는 말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 태화지(太和池)에서 문수보살을 만난 후 귀국해 태화사를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중국과의 사대관계에서 연호를 사용한 것이 일반적이지 않아서인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채택한 신라 마지막 연호(647~650년)였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는다. 왜 태화를 채택했는지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그래서 다양한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647년 당시는 신라에게 위기이자 기회의 시대였다. 왕실이 김춘추, 김유신 세력을 등에 업고 ‘비담의 난’을 초기에 진압했지만 도중에 선덕여왕은 병사해버렸다. 능력 없는 여자가 왕이라는 구실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또 연로한 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밖으로는 고구려가 당을 물리칠 정도로 강성했는데, 당태종을 이은 고종은 신라와 연합해서라도 고구려를 없애고 싶어했다. 백제-왜 연합은 645년 ‘을사의 변’으로 다소 소원해 졌지만, 왜국은 다이카(大化)라는 연호 아래 율령을 반포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해 신라에 위협이 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에게 필요한 연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들은 달랐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측근 자장율사는 신진 세력에게 대승불교를 이어달라며 태화를 주문하지 않았을까? 김춘추는 안으로는 내란으로 분열된 국론을 봉합해야 하고, 밖으로는 당은 물론 왜와도 손을 잡아야하는 처지였으니 화합이라는 뜻의 태화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는 특히 일본 다이카 개혁을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그 보다 더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닌 태화가 반갑지 않았을까? 그럼 진덕여왕은 왜 태화를 자신의 연호로 최종 승인했을까?

태화 연호는 중국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진덕여왕 이전에는 224년 조조의 손자 위명제때 처음 있었고, 477년 선비족 정권인 북위의 효문제도 이를 채택하였다. 진덕여왕은 두 전례 중 북위의 태화시대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오대산 불교는 효문제 기간에 크게 성장했는데 태화지가 이때 생겼거나 그 이름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신라가 북조와는 국교가 없었다 하더라도 진덕여왕이 신라 왕실은 흉노족, 선비족 계열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북위의 연호라 해서 꺼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위 효문제의 뒤에서는 풍태후(馮太后, 442~490)가 실권을 쥐고 한화(漢化)정책을 포함한 ‘태화개혁’을 추진했다. 진덕여왕은 덕은 있었으나 위엄이 부족해 귀족들을 제대로 거머쥐지 못했던 선덕여왕보다는, 부덕했지만 위엄이 있었던 풍태후를 높이 사지 않았을까?

정치적 맥락을 보면 결국 태화는 신라가 추진하던 통합 속의 개혁이었다. 그리고 그 개혁은 성공했다. 사실 난을 일으켰던 비담도, 그것을 기록한 후대의 김부식도 지역과 신분, 사상적 보수주의자였는데 거기에 더해 철저한 여왕 반대론자였다. 반대로 춘추와 유신은 외국과 여성, 유교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대응했다. 그런 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

지금 울산은 다른 세상과 마찬가지로 기후변화·감염병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앞으로 두 전선에서 모두 승리하기 위해서는 산업사회와 시민사회의 조화, 상업적 거리(street)와 사회적 거리(distance)의 타협, 민간의료와 공공의료의 균형이 필요하다. 과거처럼 다시 태화개혁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굽이쳐 흐르는 강이 있어 한때 회룡포(回龍浦)나 하회(河回)와 같은 뜻의 굴아화(屈阿火), 하곡(河曲)으로 불렸던 울산! 그 작은 이름을 거부하고 위대한 뜻을 품은 태화강처럼 되고자 하는 울산의 역사적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다.

김상육 울산시 시민건강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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