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에서 봉계방면으로 난 국도를 한참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멀리 반곡초등학교가 보일 때쯤 왼쪽으로 평화약방, 평화교회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평리마을회관을 지나 언양읍의 최서북단에 위치한 평야지대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나온다. 언양읍의 15개 법정리 가운데 대곡리 다음으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다개리(茶開里)다. 굼다개, 신리, 고래샘, 갈전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약 330년 전 성균관 진사 한귀생(韓貴生)이 굼다개에 처음 터를 잡은 뒤 청주한씨(淸州韓氏) 후손들이 300여년간 집성촌을 이뤄 살아온 마을이다.

 다개리의 가운데 위치해 있는 신리(새말)를 중심으로 북쪽은 고래샘, 동북쪽은 갈전(갈밭), 서남쪽은 굼다개와 접하고 있다. 굼다개는 다개리 서남쪽의 가장 후미진 마을로 위쪽에 있다고 상리라고도 불린다. 움푹 꺼진 곳을 뜻하는 굼이 깊은 다개라서 굼다개 마을이다. 마을 뒷산 아래 높은 곳에서 움푹 패인 낮은 곳까지 집과 밭들이 자리잡은 것이 이름값을 하게 생긴 마을이다. 굼이 깊어서인지 동짓달 정오무렵 내리쬐는 햇살이 온 동네를 감싸안아 따뜻해 보인다.

 다개리 입향조인 귀생은 문정공(文靖公) 좌찬성 한계희(韓繼禧 1423∼1482·중시조)의 후손으로 1673년(현종1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두고 남인과 서인이 정권다툼을 한 2차 예송(禮訟)에 연루돼 충남 천안시 목천면으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다개리의 굼다개 마을로 피난 온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언양읍 다개리 입향조인 귀생으로부터 8대~12대까지 호수로는 350여호가 전국에 흩어져 있다. 지금 다개리에는 약 20여세대가 살고 있다. 다개리 중에서도 굼다개 마을이 가장 많은 7세대가 살고 있다. 나머지 13가구는 갈전마을과 고래샘, 신리마을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친회 감사로 갈전마을에 살고 있는 한영곤(68)씨는 "많이 살 때는 다개리 전체에 100여세대까지 살았지만 지금은 다들 전국으로 흩어졌다"며 "청주한씨 재실 숭모재(崇慕齋)가 있는 굼다개 마을에는 한 때 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집성촌이었다"고 전했다.

 영곤씨는 또 148년~217년 전(1786년~1855년) 언양현에 부임해 온 현감들이 다개리 청주한씨 문정공파 문중을 찾아와 공신의 후손임을 확인하는 공증서를 써놓은 자료 6점을 보여줬다. 1780년 충훈부 관인을 찍어 공신의 후손을 공증한 사목(事目·조정의 명령을 조목조목 나열한 것) 한 권도 함께 내놨다. 한계희의 후손으로 당시 현존한 조상들로 추측되는 이들의 명단을 나열하고 당시 현감의 관인과 수결(사인) 등도 들어 있다. "한명회와 6촌간이기도 한 문정공 어른은 당시 좌찬성을 지내면서도 누추한 생활을 할 정도로 청백리로 전해집니다. 문중에서 위치를 생각하라며 준 전답에 농사를 지어 인근의 가난한 사람을 도와줘서 현재 서울의 안암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큰 바위가 있던 마을이 편안해졌다는 뜻이지요"

 현재 귀생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7월 말 다개리 일대에 모셔져 있는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한다. 또 음력 10월 중순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에는 지난 91년에 지은 재실 숭모재에서 묘사를 지낸다. 벌초와 묘사 때는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귀생의 후손 150여명이 재실을 찾는다.

 청주한씨 문정공파의 후손 가운데 다개리 출신으로는 동우(신한은행 부행장) 동룡(김천전문훈련원장) 동욱(울주군청 의회사무과 전문위원) 영호(삼남면사무소 계장) 동환(울산지방법원 계장) 상균(경북교육청 근무) 삼건(울산대학교 교수) 상용(경북 봉화고등학교 교사) 윤갑(부산 연미초등학교 교사) 동호(한국토지공사 과장) 동찬(국민연금관리공단 울산지사 대리) 동원(농협중앙회 언양지점 차장)씨 등이 있다. 입향조의 8대손인 영재씨는 재울 청주한씨 종친회장을 맡고 있다. 고 한장덕 경북 안동대 부총장도 같은 문중이다. 박은정기자 musou@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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