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萬和里)는 두동면 8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경주의 남면(南面)에 속해 있었을 때는 비자현(飛自峴)이라 했다가 정조 때는 비조항리(飛鳥項里)라 하였다. 울산군 두북면에 소속되었던 1911년에는 임동(林洞)과 비조(飛鳥)·이전(泥田)의 3개 동으로 갈라졌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임동(林洞)과 비조(飛鳥)를 합하여 만화리(萬和里)라 하였다. 만화리 동쪽에는 경남과 경북의 경계에 765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는 치술령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꼭대기에 망부석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신라 제18대 실성왕(實聖王) 당시, 신라는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왜(倭)와 백제의 계속되는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실성왕(實聖王)은 즉위하자마자 먼저 왜국(倭國)과 화친을 맺었는데, 왜왕이 선왕인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삼기를 원했다. 왕은 일찌기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던 것을 원한으로 여겨, 그 아들에게 보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왜왕의 소원대로 그를 왜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같은 11년(412)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미사흔의 형인 복호(卜好)를 인질로 데려가려 하자 왕은 또한 그대로 따랐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도 미흡하여 내물왕의 원자(元子)인 눌지(訥祉)도 죽이려고 고구려인을 자객으로 세웠다. 그러나 자객이 눌지를 만나보니 사람됨이 매우 늠름하고 풍채가 고상하여, 오히려 실성왕의 음모세력을 눌지에게 밀고하였다. 눌지는 이에 격분하여 실성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신라를 고대국가체제로 확립한 19대 눌지왕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두 아우의 생각이 간절하여 신하들과 이 일을 의논하니, 용맹과 지혜를 갖춘 삽량주(지금의 양산) 태수 박제상(朴堤上)을 천거했다. 그는 왕명을 받고 떠나 고구려왕을 만나 설득하여 왕제(王弟) 복호와 함께 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박제상은 고구려는 큰 나라요, 어진 왕이라 설득이 가능하였지만 왜인들은 속이는 수밖에 없다 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아내와 자식도 보지 않고 그 길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부인이 울부짖으며 달려와 간절히 불렀으나, 제상은 이미 떠나고 손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그 뒤 박제상은 왜왕에게 잡혀 가서 신하가 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는 왜왕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다 결국 대마도에 귀양 가서 화형을 당하였다.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왜국으로 떠난 후, 자식들을 데리고 바다가 잘 보이는 치술령 꼭대기에서, 남편의 무사환국을 천지신명에게 빌었으나, 비보를 듣고 통곡하다 죽으니, 몸은 화(化)하여 망부석이 되고 넋은 새가 되어 국수봉을 돌아 은을암(隱乙岩)에 숨었다고 한다. 비조(飛鳥 비자현)는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이 죽어 새로 화하여 날아 왔다고 하는 곳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부부가 해로하는 모습이 아쉬운 때에 박제상의 충절(忠節)과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부인의 정절(貞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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