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다운동을 지나 경북 포항까지 이어진 국도 14호선을 따라 북으로 길을 잡으면 척과와 관문성쪽으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삼거리 오른쪽에 내동주유소가 있어 찾기가 수월하다. 그 삼거리에서 관문성 방향으로 오르면 바로 범서읍 두산리 구룡(九龍)마을을 알리는 마을회관이 도로 오른쪽에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다. 이곳부터 대신마을 못미친 지점까지가 구룡마을이다. 마을회관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구룡마을 시내버스 정류소가 구룡마을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2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돼 있는 구룡마을은 옥산전씨(玉山全氏)들의 집성촌이다. 동으로는 상아산이 북구 달천과 경계를 구분해 주고 멀리 연화산과 치술령 등이 자리한 까닭에 마을 중심부에 남북으로 골이 깊게 뻗어 있다. 이 골을 따라 국도 14호선이 달린다. 구룡마을 앞 도로도 80년대 후반부터 차들로 붐비기 시작해 지금은 산뜻하게 왕복 2차선으로 포장돼 있다. 산기슭의 마을과 도로사이에 천이 자리하고 있다.
 구룡마을에 옥산전씨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때는 1800년대 초로 경주 양북에서 옮겨왔다. 처음 이 곳 구룡마을에 자리한 옥산전씨는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지낸 전환규(全煥圭) 할아버지. 환규 할아버지의 7촌 조카인 전구현(全龜鉉) 할아버지와 함께 경주 와읍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후 전권열(全權烈·75)씨가 경주에서 이곳으로 와 합세했다.
 환규 할아버지의 5대손인 전규열(全圭烈·70)씨는 "구룡마을에 처음 자리잡은 분은 환규 할아버지이지만 이곳 사람들 모두가 환규 할아버지의 5대조이자 경산을 떠나 경주 와읍에 자리를 잡았던 세무(世茂) 할아버지로부터 나온 자손들이어서 세무 할아버지를 입향조로 꼽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무 할아버지의 증조부가 선무원종 일등공신(宣武原從 一等功臣)인 계신(繼信) 할아버지로 파조인 신호위대장군(神虎"大將軍)으로 공을 세워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진 전영령(全永齡)의 12대손이 된다"고 덧붙였다.
 전만부(全萬富·65)씨는 "파조 할아버지는 도시조로 백제창립십제공신이었던 전섭(全") 할아버지의 27세손인 만큼 지금 현재 구룡마을을 지키고 있는 열(烈)자 항렬이 51세손이 되는 셈이다"고 뿌리깊음을 설명했다.
 규열씨는 "어릴 때만 해도 인근에서 "삼거리 전가"라고 불리며 구룡마을에만 20여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10여집만 남아있고 모두들 외지로 나가 있다"고 말했다.
 마을을 중심으로 골마다 생각보다 넓은 들을 갖고 있어 주로 논농사와 함께 과수원을 경작해 마을 사람들은 어렵지않게 생활했다"는 만부씨의 말에 함께 한 전권열씨도 맞장구쳤다.
 구룡마을 전씨들도 다른 집성촌과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가 현재 노인들만 고향을 지키는 집들이 많다.
 울산을 비롯해 부산, 서울 등 전국에 100여집이 이 곳 범서읍 두산리 구룡마을을 고향으로 삼고 있다.
 구룡마을 출신으로는 입향조의 6세손인 전진수(全"秀)씨가 농협중앙회 울주군지부장으로 활동 중에 있으며 울산축협에 근무중인 전진하씨도 같은 항렬이다.
 또 범서읍 승격 추진위원장을 맡아 범서읍 승격에 일익을 담당한 전규열(全圭烈)씨도 구룡마을 토박이이며, 규열씨의 장자가 울산시의원을 지낸 전경환(全庚煥) 전의원이고 둘째가 전영록(全永")씨로 현재 제주관광대학교 사회복지학과장로 재직중이다.
 이밖에 전두열(全枓烈) 신정고 전 동창회장과 전부열(全扶烈) 부산신광산업사 대표를 비롯해 부산에서 해송전업사를 운영중인 전봉열(全峰烈)씨와 봉열씨의 아들로 한의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태진(泰")씨도 같은 문중이다.
 또 육군대령과 소령으로 각각 예편해 서울에서 활동중인 전득열씨와 전병호씨, 중국 북경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전진윤(全"閏)씨 등도 구룡마을 옥산전씨의 일가들이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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