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촌면은 울산광역시와 울주군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울주군 청량면과 접하고, 서쪽은 울주군 삼동면, 경남 양산시 하북면과 접한다. 남쪽은 경남 양산시 웅상읍, 울주군 온양읍과 접하며, 북쪽은 울주군 삼동면 및 청량면과 접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32 제1 제사의 소사조에는 우불산(于弗山)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우불산을 "于火 生西良郡 于火縣"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소사에 산악신은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 우불산에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조선 〈태종실록〉 14년 8월 신유의 기록을 보면 신라 때처럼 우불산을 소사로 다시 받들었고, 〈신증 동국여지승람〉 울산군 사묘(祀廟)조에는 사전의 소사에 올라 있는데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하고, 가뭄 때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울산부 서면장(西面將)은 우불산성에 진을 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왜병이 지경고개를 넘어 덕계(새버든)에서 화승총을 쏘면서 물밀 듯 쳐들어 왔다. 그 때 남루한 차림의 도인이 걸어와 이미 회야강 건너편 왜시등(삼호리 삼니마을 입구 솔밭)에 구름같이 진을 친 왜병들을 바라보며 필묵을 꺼내들어 글을 쓰고는 손에 집어 들었다. 글 쓴 종이를 하늘에 날리자 산들바람에 실려 대운산 상봉에 떨어졌다. 그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낙엽이 하늘을 덮듯 왜시등에 떨어졌는데 낙엽이 땅에 떨어지면서 하나하나가 모두 병졸들이 되어 왜병들을 순식간에 물리쳤다. 이 때 왜병 수백 명이 섬멸당하고 말았는데, 그 바람을 신풍(神風), 진지를 왜시등(倭屍嶝)이라 하였다.  우불산 앞길에는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만 했는데 어쩌다 말을 탄 채 지나가다가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 하루는 경상감사 양씨가 이러한 소문을 들어 알면서도 이를 의심하여 교만하게도 승마한 채 지나는데 홀연히 한 점 붉은 구름이 산꼭대기에 뜨더니 맹호로 돌변해 그를 물어 죽이니 그 무덤이 아직 웅촌면 검단리 산기슭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조정에서도 이를 듣고 영험이 크다 하여 인조 갑신년(1644)에 제사(齊舍) 3간을 세우고 임야 및 전답 5두락을 단의 재물로 하여 해마다 2월과 8월 하정일(下丁日)에 울산부사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일제 때에는 강제로 사람들을 동원하여 신사를 헐게 하였는데 누구도 두려워하여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윤씨라는 사람이 나서 큰 소리 치며 나서면서 건물을 헐었는데 불과 며칠 후에 갑자기 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그 후에도 칼을 찬 어떤 일본 헌병이 말을 몰아 왜시등을 지나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우리 땅이며 이미 지금도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는 독도를 두고 일본이 또다시 문제를 삼고 있다. 힘으로 신사를 헐다가 험한 꼴을 보게 되는 모습이나, 왜 헌병의 무례까지도 결코 용납되지 않음을 보면 우리 땅에는 신령한 기운이 있는 듯 하여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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