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눌지왕(417~458) 때의 충신 박제상이 헌강왕 때(875~886년)의 처용을 만났다면 어떤 사이가 됐을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삽라군 태수로 있던 박제상은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아들 미사흔을 구출하러 갔다가 왜의 신하가 되느니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되겠다면서 죽임을 당했던 충신이었다. 처용 역시 동해용왕의 아들로 헌강왕을 따라가 급간의 벼슬을 받아 왕을 도왔고 역신을 물리쳤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신라에 적잖은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들이 한 시대에 살았다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 가설은 현재로 이어져 새로운 만남을 만들고 있다.

 울산에서는 처용암(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남구 황성동 668-1번지)지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윤대헌씨(54·울산시 중구 다운동)와 박제상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치산서원(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울산시 두동면 만화리 산 30-2)의 관리인이자 문화유산해설사인 박치수씨(54·울산시 두동면 만화리). 이들은 서로를 "윤처용", "박치산"이라고 부르며 각별한 친분으로 울산의 문화유산을 돌보고 있다.

 문화유산해설사들 사이에서도 당연히 이들은 처용과 치산으로 불린다. 문화재관리인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그 문화유적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냐마는 이들은 족히 그 이름값을 하고도 남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름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들의 만남도 1년6개월전 문화유산해설사 교육을 받으면서 새삼스레 시작됐다. 울산시가 마련한 문화유산해설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중에 학성공원으로 답사를 나선 날이었다. 박치수씨는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챙겨먹고 잠시 쉬러 내려가다가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윤대헌씨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윤대헌씨가 먼저 "니 치수아이가"라고 말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 기억을 더듬고 있는 박치산씨에게 다시 "내 중학교 2학년 때 졸도했던 윤대헌이다"라고 말했다.

 삽시간에 시간은 제일중학교 2학년 시절로 돌아갔다. 체육시간이었다. 체육복을 갈아입던 윤대헌씨가 교복바지에 매고 있던 허리띠를 목에 걸고 있었다. 개구장이였던 한 친구가 뒤에서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윤대헌씨는 그대로 졸도했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6시간만에야 깨어났다.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을 기억 못하랴. 박치수씨는 금세 "그래, 맞다. 니 대헌이다"라고 답했고 30여년 세월은 눈녹듯 녹아버렸다.

 그 뒤로 그들은 "치산", "처용"으로 부르며 삼일이 멀다하고 만난다. 여전히 시티투어 차를 타고 문화유산해설사 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지만 딱히 맡은 일이 없는 윤처용은 사흘이 멀다하고 박치산으로 찾아간다. 못 만나는 날은 하루에 10여통의 전화를 주고 받는다. 처용이 시티투어 차를 타는 날이면 옮겨다니는 내내 중계하듯 치산에게 보고를 하고 차가 치산서원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전화를 걸어 "다 돼 간다. 커피 삶아 놔라"고 한다. 커피는 처용의 소주 안주다.

 커피를 "삶는다"고 하는데서 그들다운 연대감이 읽혀진다. 햇볕에 그을려 까맣고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에다 욕심을 벗어버린 넉넉한 촌부의 인상을 가진 이들에게 "끓인다"는 말은 너무 세련된 표현인 것이다.

 치산서원에 도착한 처용이 소주를 마시고 있는 동안 치산은 박제상과 치산서원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설명은 30분이 넘게 걸린다. 한번 휘 둘러보고 말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30분씩이나 하는 것만 보아도 그도 문화유산에 관한한 못말리는 사람이다. 어떤 문화유산이든 누가 물어보기만 하면 그 자체가 그저 반가워서 연도까지 당시 사회적 배경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읊어대는 윤처용에 버금간다.

 박제상의 후손이기도 한 박치수씨는 치산서원 관리인이 된 지 이제 4년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대를 물린 치산서원지기다. 치산서원이 있는 울산시 두동면 만화리 비조마을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부산으로 서울로 유학했고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줄곧 부산에서 사업을 했기 때문에 50세가 될 때까지 치산서원이니 문화재니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IMF와 함께 사업이 어려워졌고 그는 단감농사를 짓는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후손의 자격으로 치산서원을 관리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일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기왕에 하는 일,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박제상에 관해 공부를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온 지난날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지만 의외로 빨리, 쉽게 빠져들었다. 관리인으로 지정되었고 문화유산해설사 교육도 받았다. 그는 "상과를 졸업하고 사업만 했으니 문화가 뭔지도 몰랐지만 막상 이 방면의 공부를 하다보니 오히려 이 쪽이 내게 훨씬 잘 맞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라며 "새삼 사는 재미를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은 공해에 밀려 마을도, 처용암도 떠나 다운동에 살고 있는 윤대헌씨는 치산서원 보조 관리인이기를 자처하면서도 처용암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황성동 668번지가 그의 집이고 그가 집보다 더 자주 들락거렸던 처용암은 황성동 668-1번지다. 그는 처용암지기가 된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처용암 관리인은 다른 사람이 맡고 있지만 윤처용이란 이름에는 흔들림이 없다. 처용의 이름은 치산을 만나 더욱 확고하다. 글=정명숙기자 jms, 사진=김동수 dskim@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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