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언양읍에서 봉계·경주로 가는 국도 35호선을 따라 가다가 반구대 암각화 진입로를 지나 언양읍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멀리 반곡초등학교가 보인다. 왼쪽으로 보이는 다개리 입구를 지나면 두남학교를 알리는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두남학교를 지나면 송정공동목욕탕, 구량보건소가 차례로 보이고 잠시 후면 멀리서 보더라도 장고한 세월만큼이나 우람한 체구를 가진 두서은행나무도 만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계속 올라가면 100여집 규모의 울주군 두서면 차리마을이 나온다. 차리마을회관과 차리예배당이 있는 하차리, 중차리 회관이 있는 중차리다. 중차리를 지나서 고헌산으로 막혀있는 막다른 지점까지 강을 따라 나있는 마을이 경주김씨 집성촌인 상차리다.
 날이 제법 풀린듯 하지만 상차리 마을로 불어닥치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상차리 마을은 고헌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다른 마을보다 춥다.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키가 큰 소나무 두 그루와 잘 지어진 재실이 나온다. 40여집이 살고있는 상차리 마을에서 30집을 차지하는 경주김씨 재실 감은정(感恩亭)이다.
 경주에서 처음 이곳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린 이는 조선조 단종 계유(1453)에 성균관 진사를 지낸 종우(從禹)의 13세손 명우(命禹)로 가선대부를 지냈다. 당시 두서면 인보리 선필마을에 자리를 잡은 명우의 세 아들 가운데 셋째아들인 규한(奎漢)이 약 200여년 전 차리로 옮겨 왔다.
 김종식(79·언양향교 성균관 유도회 회장)씨는 "명우 할아버지의 세 아들이 각각 선필마을과 소호마을, 차리로 이주했는데 차리에 온 명우의 손자 규한 할아버지만 차리에 정착하고 나머지는 타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나에게 6대 할아버지인 규한 할아버지는 당시 절충장군을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차리마을 김씨 문중에서는 1850년 전후의 규한 할아버지의 호적 약 30부와 교지 소량이 물려져 내려오고 있다. 지난 3년 전까지만 해도 규한이 차고 다녔다던 호패(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자가 차고 다니던 것)도 함께 보관돼 있었지만 면지편찬 과정에서 분실했다.
 종식씨는 "문중에서는 가보나 다름없던 것을 잃어버린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이미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면지편찬위원회가 위로의 표시로 만들어준 "경주감씨가문 호패증" 액자만 보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30집이 12촌 이내의 일가친척이지만 이 가운데 김씨 어른이 살아있는 집은 10집 뿐이다. 살아있는 김씨 가운데 최고령자는 종식씨와 영수씨로 79세다. 나머지 지상, 지춘, 기식, 지승씨 모두 70을 바라보고 있다.
 명우로 부터 뻗어나온 후손은 현재 울산, 부산, 창원 등 전국에 170여집 정도가 퍼져 살고 있다. 명우 이후 조상을 모시고 있는 감은정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매년 11월 셋째주 일요일 합동묘제를 올리고 있다. 재실에는 또 성균관 진사를 지낸 종우의 후손임을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20년 전 문중에서 뜻을 모아 "김종우 세적비"를 세웠다.
 이 마을 출신으로 기훈씨가 울산시의회사무처(6급)에 근무하고 있고 진원씨가 창원에서 금강설비, 지영씨가 마산에서 한국판넬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박은정기자 musou@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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