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이북인 사람은 "통일"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더이상 고향을 되찾을 희망조차 잃은 실향민입니다"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 "광주노씨"와 "영월엄씨"는 온산이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전략사업의 하나로 선정되면서 수백년 동안 살아 온 고향을 떠나야 했다. 또 청량면 중리에서 400여년을 살아 온 "남원양씨"와 "연안차씨"도 80년대 회야댐 건설과 함께 고향땅을 등졌다. 이밖에도 도시의 확대로 토지구획정리사업, 도로확장사업 등에 떠밀려 고향땅을 떠난 성씨도 만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물리적 요인보다 반세기 전부터 불기 시작한 산업화와 현대화의 물결을 따라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더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마을마다 부지기수였다. 울산의 집성촌 그 어느 곳을 찾아도 결국 남아있는 사람보다는 떠난 사람이 많았다.
 특히 울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 가운데 "울산박씨", "학성이씨", "울산김씨", "언양김씨" 등은 그 뿌리를 굳건히 갖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울산오씨"는 그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오히려 서울의 울산오씨 종친회로 부터 취재도중 울산오씨를 찾게되면 꼭 알려달라는 부탁만 받아뒀다.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조상 대대로 수백년을 지켜온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넋두리는 저녁 설겆이 통에 밥그릇 둘, 수저 두벌 뿐인 시골마을 삶보다도 더 쓸쓸해 보였다.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한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 집성촌. 예전에는 "천석꾼"이 날만한 터를 찾아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이룬 마을이지만, 지금은 땅을 파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젊은 이들이 도심지의 학교로 진학을 하고 자연스럽게 도시에 정착하면서 집성촌 의미는 퇴색돼 가고 있었다.
 하지만 수백년 동안 집성촌의 명맥을 이어 온 곳에는 어디나 그들과 같이 기나긴 시간을 함께 걸어 온 역사가 함께 하고 있었다. 울주군 웅촌면 돌내마을에는 24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학성이씨" 서면파 고가(울산시 문화재자료 제3호)가 있고, "경주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상북면 명촌리에는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만정헌(萬定軒·울산시지정 문화재자료 제2호)이 남아 있었다.
 또 수령 500년이 넘어선 두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 또한 550여년 전 두서면 구량리 일대에서 마을을 이룬 "경주이씨"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나무다.
 현재 불리고 있는 지명 또한 집성촌을 이룬 사람들에게서 유래되기도 했다. 삼동면은 "영산신씨"의 세 형제가 하잠, 방기, 조랑마을에 각각 흩어져 살면서 마을은 달라도 집안은 하나라는 의미를 담아 삼동(三同)으로 불려오고 있다.
 본지에 소개된 40여곳의 집성촌 가운데 대부분이 울주군 지역임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울산 토박이는 울주군 사람 뿐"이라는 말 처럼 언양을 중심으로 울산 시가지보다 먼저 형성된 울주군에서 집성촌의 흔적을 찾는 것은 당연했다.
 간혹 도시 생활을 접고 노년을 시골에서 보내려는 사람들이 집성촌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눈에 띄는 집을 짓고 사는 일이 늘면서 소박한 시골마을 이미지를 잃어가고 있는 마을도 많았다. 그래도 마을 경로당 만큼은 아직 8촌 내의 친척, 먼 집안 사람들끼리 집안 수저가 몇 벌인지, 누구네 집에서 암송아지를 낳았는지 수송아지를 낳았는지를 이야기하는 유일한 안식처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 이 동네에 ○○ ○씨가 몇 집이나 살고 있어요?" "많지~"
 "그럼 할아버지,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다는 ○○는 어디쯤에 있어요?" "저~쪽에 안 있나. 금방 가"
 "몇 년 전"이라는 질문에는 "오래됐지", "몇 집"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그냥 "많이 살지"라고 말하는 통에 취재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풋풋한 사람내음 만큼은 잊혀지지 않았다. 비록 차를 타고 10여분 가야 하는 길 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저~기"라는 어른의 말만 믿고 추운 겨울날 헛걸음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지구촌 시대에 왠 집성촌이라는 악평과 퇴색돼가는 집성촌의 의미를 되짚어 주고 사람사는 이야기가 배어있는 기획물이라는 비교적 호평이 글을 실기시작한 지난 1년 가까운 시간동안 공존했다. 집성촌이 갖는 의미를 대변한 듯 싶다.
 울산사람이라면 울산의 역사를 함께 해 온 마을과 그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분명 의미깊은 일이 아닐까 싶다. 문화교육부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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