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되새김에서 ‘특별함’으로
개념 변화 따라 방식도 달라져
복고 탈피 미래적 디자인 필요

▲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꼬맹이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 따라 초겨울 한 잔치에 갔다. 언양 주변 동네였는데, 부근에 새 댐이 건설되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됐다고 했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이별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 장구가락, 꽹가리소리를 배경으로 어른들이 춤을 추었고 누런 막걸리 주전자와 양은 사발, 아무렇게 썬 파전과 편육이 수북한 하얀 접시가 기억난다. 곧 물속에 잠길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의 저녁. 싸늘한 어스름과 왁자지껄한 잔치가 뒤섞인 풍광은 뭣도 모르는 꼬맹이에게 조차 한없이 쓸쓸했다. 후일 사람들은 각자의 다음 터전으로 이주했을 것이고, 그 논밭과 가옥들을 품은 마을은 깊은 물속에 잠겼을 것이다.

올해 2월27일 토요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호텔은 모처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젊은 연인, 아기와 함께 온 커플도 있었고, 큰 자녀들과 같이 자리한 중장년 가족도 있었다. 멋진 차림새 백발의 노부부까지 그 호텔에 모인 이유는, 다음날 영업을 종료하는 호텔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전 객실 만실, 모든 식음료업장이 만석이었다. 남서울호텔에서 리츠칼튼으로, 다시 르메르디앙으로 브랜드가 바뀌면서도 수십년 자리를 지켰던 한 호텔에 얽힌 각자의 기억이 예뻤기 때문 아닐까. 내일이면 철거되어 사라질 호텔 곳곳을 사진찍는 남녀노소 선남선녀의 눈시울이 붉었다.

그 얼굴에는, 결혼식을 올렸던 식장, 사랑을 고백했던 공간, 처음 선을 본 호텔 커피숍, 아기돌잔치 장소이자 또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바쳐 일했던 직장을 기념하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자정을 넘어서야 조용해진 로비는 시간이 멈춘 듯 애잔했다.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호텔은 영업을 종료했고, 건축물은 사라지게 됐다.

사라짐, 죽음, 상실을 겪는 마음은 ‘두번 다시 마주할 수 없다는 아쉬움’에 있다. 이를 기념하는 의식은 주체의 방식대로 다양하게 치러진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거나 기념물을 만들고 나무를 심기도 한다. 매년 찾는 모임, 제사나 성묘, 특정일을 정해 매년 행사를 여는 것, 사업을 만드는 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기념의 의식이다.

지난해 스타벅스는 ‘E프리퀀시’라는 이벤트로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커피잔 당 1개의 스탬프를 주고, 17개를 채우면 가방을 증정했다. 한정된 수량이 소진되면 종료되는 행사였다. 신세계 정용진 회장이 SNS에 가방을 인증샷하는 바람에 갑자기 너도나도 커피런하는 난리가 났다. 수백잔을 결제해 가방 수십개를 받고는 커피를 팽개치는 사람도 생겼다. 온라인 중개마켓에서는 웃돈을 주고 가방이 매매됐다. 젊은 세대의 의식, ‘소확행’이나 ‘마니아 문화’로 분석하는 뉴스가 나왔다. 맞는 말이다. 다양한 상품들은 오늘도 한정판, 선착순을 도구로 2030세대들을 밤새 줄서게 하고, 오픈런하게 한다. ‘한정’에 열광하는 이 현상은, 그 스타벅스 가방을 가진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기념’하기 때문이다. 열광하는 의식, 그 가방을 사는 것이 기념방식이다.

희한한 일이다. ‘의미의 되새김’에서 ‘묻지마 특별함’으로, 기념의 개념이 변했다. 이 현상은 긍정 부정을 떠나 큰 파장이다.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 ‘한정판’ ‘에디션’을 시장에 내놓는 마케팅이 유행이다. ‘기념’이 수단으로 유용할수록 우리의 ‘기념’은 변화한다.

부산 해운대 미포에 풍경열차와 모노레일이 생겼다. 송정까지의 해안절경을 오가는 관광모빌리티다. 옛 동해남부선 폐선구간을 친환경 전기동력으로 재구성한 21세기의 의미있는 기념물이다. 그런데 형태가 문제다. 모노레일은 양철통을 두드려 만든 구식놀이 기구 같고, 레이스 장식을 휘감은 풍경열차는 일제시대를 연상시킨다. 도대체 무엇을 기념하는 것인가? 새로운 첨단도시를 외치면서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근대화의 추억을? 국적불명 복고풍이 아니라 시원한 유리캡슐 같은 미래적 디자인으로 미래 부산과 21세기 모빌리티를 기념해야 했다. 이용자의 많고 적음과는 별개로 달맞이고개 풍광을 구식 놀이동산으로 망쳐버린 책임자는 기념의 뜻을 되짚어보시길.

우리도 커피런, 오픈런하기 전에 꼭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기념이길래 이리 뛸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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