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기란 뜻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경찰마저 믿을 수 없는 불안한 도시
건축가 “한국 경비시스템 배우고파”

▲ 성인수 울산도시공사 사장

어쩌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 번이나 갔었지? 아마도 1990년 몬트리올 세계건축가연맹(UIA)총회 참석차 캐나다와 미국을 견학한 후 다른 도시에 대한 궁금증이 늘었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40세 이하 청년에 속하는 마지막 해에 ‘UIA91 세계청년건축가 워크숍’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12시간씩 두 번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지구 반대쪽 세상은 우리와 다른 줄 알고, 큰 맘 먹고 참석하게 된 행사였다.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청년건축가 3명과 필자, 칠레 부부건축가, 브라질 출신 등 7명 1팀이 공동 설계하는 팀별 경쟁행사였다. 체재비를 부담해준대서 가져간 면세양주 선물에 호들갑을 떤 아르헨티나 청년들은 부실한 자기 나라에 불만이 많았다. 로사리오 출신들과 호텔서 같이 지내며 라플라타 강변 도시설계 아이디어를 교류했다. 그들은 희망에 찬, 가난한 청년 건축인들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유럽풍 도시라 실망스러웠다. 원주민 식당 웨이터가 가수 나훈아를 닮아 고(古)아시아 인디오족을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어로 ‘좋은(Buenos) 공기(Aires)’란 뜻이다. 유럽 침략자의 코로 향긋한 맑은 공기가 인상적이었던 거다. 아르헨티나인은 정신적 뿌리가 지중해에 있다고 믿지만, 1982년 영국과 말비나스전쟁 후 남아메리카에 있는 종족임을 깨달았다.

한국이 낯선 남미 청년 건축가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는 게 어려웠지만, 스페인 문화권과 언어를 익히는데 주력했다. 그들은 당시 영국과 미국에 적대적이어서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 초보 스페인어와 영어로 어렵게 소통하며 라플라타 강변을 어떻게 개발할지 같이 고민했다. 동양을 배경으로 조금은 색다른 건축적 아이디어를 지닌 한국인 건축가로서의 역할을 했다.

두번째는 2014년 아내와 세계일주 배낭여행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함시켰다. 23년 만에 만난 건축가 곤살로는 성공해 있었다. 그는 청년건축가로서 함께 고민했던 라플라타강변의 실제 현장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그의 도움 없이 다녀야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안전하지 않았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안내를 해 줄 여교수도 소개해 주었는데, 쉽게 여기다가 봉변을 당해 경찰서에도 갔다. 그런데 경찰에게도 당할 뻔 했다. 아르헨티나, 칠레, 쿠바 등 도난 미수 건으로 경찰서를 한 번씩 들러야 했다.

처음 갔을 때는 건축만 보았으나, 세계일주 때는 이과수폭포와 거대예수상 등 일반 여행이었다. 남미 여행지 곳곳에 여전히 살아 있는 체게바라를 있는 그대로 느꼈다. 의대생으로서 시작과 체게바라가 자각한 남미 실정, 쿠바의 카스트로와의 만남 이후 체는 영웅이었다. 그는 끝없는 투쟁과 고난을 자처했다. 그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 못지않게 그가 남긴 일기가 그를 영원한 존재로 각인시켰다.

아르헨티나는 제2차 세계대전 전 한국보다 경제가 나았으나, 포퓰리즘과 군부독재의 반복으로 갈수록 어려워졌다. 해외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30% 더 부과된다고 친구도 이민을 고민했다고 한다. 팀이었던 다른 친구들은 건강 등의 이유로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정치·경제가 국민들을 불편하게 하고, 치안을 걱정하게 만든다. 책임은 국가에게 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절감했던 여행이다.

30년 전이나, 다시 만난 7년 전이나, 지금까지도 곤살로는 한국을 부러워한다. 친구 곤살로 차로 집 구경을 갔는데, 부촌단지를 경호하는 사설경호인이 총을 휴대하고 검문했다. 동양인 부부가 동행했다고 유심히 보는 듯 했다. 곤살로는 설계도 했고 자신도 살고 있는 부촌 주거단지를 위한 무인경비시스템을 배우러 한국에 오고 싶어 했다. 언제든지 울산으로 놀러오라고 말해 주었다.

성인수 울산도시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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