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①

비잔틴제국의 수도로 로마문명 계승
대도시로 번성 새 비잔틴문명 꽃피워
인공수로 떠받치는 아치형 ‘수도교’
8만t의 물 저장 거대한 ‘지하 수조’
10만명 수용 스타디움 ‘히포드럼’ 등
경탄할만한 도시기반시설 구축 기술
로마제국의 위상과 황제 권위 반영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발칸 반도 동쪽 끝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만나는 아나톨리아 반도, 바로 오늘날의 터키 땅이다. 그 해협 양쪽에 걸쳐 이스탄불(Istanbul)이 있다. 다리를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 지구가 갈려있으니 이를 동서양의 경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양 대륙을 거점으로 오랫동안 대립해 온 역사도 이러한 지정학적 인식을 굳혀 주었다. 과연 터키는 유럽일까, 아시아일까?

문명사의 관점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땅은 고정되어 있으나 문명은 시대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실상 10세기 이전까지 아나톨리아 반도는 서방세계의 땅이었다. 기원전 8세기 이전부터 이미 에게해를 건너온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폴리스)를 건설했고, 기원전 1세기에는 그 지배권이 로마로 넘어갔으며, 4세기부터는 동로마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게해 연안의 도시에서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유적, 또한 비잔틴 유적을 만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스탄불은 비잔틴 문명의 본산이다. 서기 467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제국의 중심은 옛 그리스 도시국가였던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겨 갔고, 그 이름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바꾸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5세기 오스만 제국 시대 이후에 얻은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로마문명을 계승한 콘스탄티노플은 인구 50만 명을 수용하는 세계 대도시로 번성하면서 새로운 비잔틴문명을 꽃 피우게 된다.

로마제국 시대의 유산은 아직도 이 도시의 저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플 건설 시기에 도시전체를 둘러 쌓았던 성벽이다. 병영도시를 건설하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던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삼중 성벽으로 쌓아 천년동안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15세기에 세계 최대의 대포와 함께 15만 대군을 몰고 온 투르크 군대에 맞서 겨우 7000명의 로마군사가 한 달 이상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성벽의 견고함 때문이다. 이후 오스만 제국시대에도 성벽은 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니, 1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최고의 요새라고 할 것이다.

▲ 그리스 신전에서나 볼 수 있는 늘씬한 대리석 기둥들이 뻗어 올라 있는 예레바탄 사라이 지하 저수조.
▲ 그리스 신전에서나 볼 수 있는 늘씬한 대리석 기둥들이 뻗어 올라 있는 예레바탄 사라이 지하 저수조.

로마인들이 만든 도시에서 경탄할만한 것은 도로나 상하수도와 같은 도시기반을 구축하는 기술이다. 특히 인공수로를 만들어 안정된 수자원을 공급하는 기술은 아마 로마인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석재를 아치로 쌓아 마치 다리처럼 언덕사이를 건너지르는 수로를 만들었다. 이 기술을 이용하여 그들은 수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안정적인 수자원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인구 50만을 수용하는 콘스탄티노플에도 수도교가 건설됐다. 도심으로부터 약 20㎞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시작된 수도교는 산과 계곡을 가로 질러 깨끗하고 풍부한 물을 공급했다. 이 덕분에 도시는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할 수 있었다. 중층 아치로 구성된 로마의 수도교는 도시공학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한 예술품이다. 오늘날 수자원 공급이 지하수도관으로 대체된 이후에도, 심지어 현대적 교통체계에 방해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수도교는 많은 로마도시에서 꿋꿋이 살아남았다. 현대도시 이스탄불의 도로를 가로지르는 발렌스 수도교의 존재는 오래된 유적이라기보다 로마도시의 업적과 위용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수도교를 통해 도시로 흘러 온 물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저수조가 필요했다. 로마인들은 저수조를 만드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그들은 광장 밑에 지하를 파고 저수조를 건설했다.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데는 지하가 유리했을 것이다.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지하 수조를 만든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지상의 무게와 수압을 견딜 만큼 튼튼해야 하고, 방수처리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높이 8m의 기둥을 4m 간격으로 배치하여 가로 143m, 세로 65m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구조물을 건설하는 데 노예 7000명이 동원됐다. 수압에 견딜 만큼 두꺼운 외벽과 석회를 이용해 방수층을 만드는 기술도 적용됐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예술적 감성은 이 음침한 지하 물 창고마저 허투루 짓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스 신전에서나 볼 수 있는 늘씬한 대리석 기둥들이 뻗어 올라 아름다운 주두장식을 두었고, 천정은 4면으로 나누어 리브 볼트(ribbed vault)로 구성했다. 가히 신전이나 궁전에서나 볼 수 있는 건축적 품격이다. 터키인들이 이를 저수조가 아닌 ‘예레바탄 사라이(지하궁전)’라고 부르게 된 것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곳에 저장된 물은 도시인들의 식수와 생활용수가 되고, 목욕탕과 정원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로마도시의 흔적은 히포드럼(Hippodrum)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다소 황량한 광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로마인들이 오락거리로 가장 즐겼던 원형경기장이었다. 2세기에 검투경기장으로 건설된 것을 4세기에 전차경기장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마치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 장면처럼 U자형으로 경기장을 둘러싼 관람석에는 40줄의 계단식 좌석을 두었고, 10만 명을 수용하는 어마어마한 스타디움이었다.

거창한 도시 시설들은 제국의 위상과 황제의 권위를 반영한다. 하지만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중적 도시기반시설을 구축하는데 열성적이었다는 점은 공화정체제에 기반을 두었던 로마 도시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다. 그들은 유럽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대륙에서 비잔틴 문명을 건설했고, 이는 오스만 투르크에 계승되어 터키 이슬람문명의 기반이 됐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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