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음식
맛·가족에서 비주얼·사회관계
생존 수단서 문화 장르로 변화

▲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확실한 기준은 무엇일까?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규칙을 지키는 것은 개미들도 한다. 도구를 쓰거나 학습을 통한 집단발전도 여러 동물군에서 관찰된다.

그런데 불을 사용하고, 채소와 육류, 생선까지 갖은 방법으로 요리하고 각 문화권 방식으로 식사하는 관습은 인간뿐이다. 그래서 음식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간 어른 모임 식당은 늘 바닥에 앉는 구조였다. 딱히 몸이 아픈 곳은 없었지만, 꼬맹이에게 양반다리를 해야 하는 테이블은 너무 불편했다. 음식도 고통이었다. 도무지 친숙할 수 없는 물컹한 생선회는 차라리 나았다. 뜨겁고, 맵고, 낯선 향신료가 코를 찌르는 무슨 탕과 볶음의 향연. 어머니가 떠주시는 숟가락을 반강제로 삼켜야 했다. 어린이에게 식당은 어른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버텨야 하는 고역의 장소였다.

과거에는 ‘배부르게’가 식사의 미덕이었다. 배 두드리며 ‘아 잘 먹었다’는 최고의 식후 멘트였다.

맛과 양이 먼저라 모양새는 아무렇지 않았던 시절, 음식 생김새를 따지면 까다로운 취향이라 했다. 우리 음식은 재료가 무엇이든 온통 시뻘겋고 김이 나는 덩어리 산더미였다. 거기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툭툭 찔러 넣기 예사였으니 개인 접시라도 있으면 꽤 좋은 식사였다. 양식당이나 일식당은 특별했다. 음식이 접시에 놓이는 정갈한 비주얼은 경외심 가득한 고차원 식사였다.

요즘은 바닥에 앉는 테이블이 거의 사라졌고 의자에 앉는 형식이 주류다. 종류도 다양하다. 한-중-일-양식 4개 구분은 이제 나라수 만큼 많다. 양식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지중해 미국 영국 남미 호주식 등으로 세밀하다. 일식당들은 지방별로 나뉠 정도다. 세상 진미는 기본이고 퓨전요리까지 창의성이 넘쳐난다. 천지개벽이다.

새로운 현상도 있다. 먹기 전 음식사진을 찍는 것. 각자 휴대폰 속 앨범에 음식 사진 몇컷 정도는 다 있다. 우리는 왜 음식사진을 찍을까? 식사의 시퀀스를 기념하고 싶어서다. 그 기념은 시각 이미지의 비중이 제일 크다. 맛은 혀를 통해 개인의 경험으로 남지만, 음식의 이미지는 SNS를 통해 주변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식기, 접시, 테이블, 의자, 벽, 천정, 실내공간의 장식, 조명, 손님부류와 연령대, 배경음악까지 전부 이미지화 된다. 비주얼이 맛과 대등하거나 더 힘센 시대다. 그래서 요즘은 동네분식집 떡볶이 마저 예쁘다. 디자인하는 필자에겐 참 기분좋은 변화다.

식구라는 단어가 있다. 밥을 함께 먹는(식) 사람(구)이라는 뜻으로 우리에겐 가족의 다른 말이다.

옛날에는 가족끼리만 함께 식사했다는 뜻이다. 역사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막 장면과 달리, 실제 조선중기까지도 음식을 사고 파는 식당이라는 플랫폼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혼상제 이벤트가 전부였는데, 이 또한 친족이나 동일 지역 인적네트워크 내의 특별경험이었다. 따라서 밥을 같이 먹는 것,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가족에 준하는 대우라는 귀한 의미가 들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직장동료나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거꾸로 가족과 식사하는 횟수가 더 적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촘촘한 인간관계로 발전했다. 예전과 달리 한집 건너, 종류도 이름도 다른 음식점 천지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모르는 사람, 아무나, 싫은 사람과 밥을 같이 먹지는 않는다. 여전히, 함께 하는 식사는 마음을 열고 가치를 공유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현대사회 많은 회의, 비즈니스 미팅은 물론 국가원수간 회담에도 식사가 포함된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음식과 식사는 이리도 특별하다. 그러니 더 더욱, 말로만 ‘밥 한번 먹읍시다’라는 공염불은 날리지 말자. 참 어려운 요즘이다. 팬데믹이 잠잠해지면, 비주얼 좋은 식당에서 반가운 사람들과 식사 한번 합시다. 숟가락 들기 전 폰카 ‘찰칵’도 잊지 말고요.

정연우 UNIST 디자인학과 교수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