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문화제 백일장에 참가할 어린이들을 사전지도할거라며 초등학교 선생님이 처용에 대해 알려달라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잠깐 머뭇거렸던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옆으로 비켜보면서 고전 "삼국유사"를 펼쳤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풀이해 주었다.

 "서라벌 달 밝은밤 깊도록 노니다가/ 자리(침실)에 돌아오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것인데 다른 둘은 뉘것이뇨/ 본디 내것이언만 뺏겼음을 어이하리"

 예상했던 것 처럼 얼굴을 붉히며 어쩔줄 몰라하는 여선생에게 뒷이야기를 마저 들려주며 "어린이들에게 곧이 곧대로야 가르칠 수 없지 않을까요?"라고 단서달기를 잊지 않았다. 학교장을 지내다 퇴직한 분들이 "처용설화"를 울산문화의 표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전체 울산의 남편들을 모독하는 일이라며 목청을 높이던 일이 생각난다.

 또 일전에 외지에서 울산온 지 2년이 되었다는 젊은 여간호원이 "울산에 처용말고 높이 받들 문화인물이 없습니까?"라는 물음을 받고 당황했던 일도 있었다. 이렇게 처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울산시민의 상당수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봉건·보수적이였을 고려때에 이미 처용사상을 받들어 노래(처용가)를 지어 불렀으며 탈춤(처용무)을 만들어 궁중의식화 했었다.

 그리고 한국 유수의 고문학자들이 처용문학에 대한 논문을 앞다투어 발표하고 있는가 하면 처용을 뮤지컬로 꾸며 문화상품화 한다는 것 등은 처용을 가진 울산인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주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다하여 아내의 부정행위 불용납을 고집하여 처용사상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잘못이라거나 이단시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처용의 관용, 인내, 화합정신을 백만 울산인 모두가 떳떳이 기리고 공감하고 동의하는 처용으로 있게 하기 위해서는 처용이야기를 시대와 계층수준에 맞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으리라 믿는다.

 화려한 문화행사에 앞서 유관기관의 설문조사나 공청회 등을 거쳐 행해져야할 선결문제라 생각되는 것이다. 처용설화를 상황에 따라 바꾸어 쓴 글을 재조명의 한 예시로 옮겨 적어본다.

"처용이 늦은 밤에 돌아와 방문을 열었더니 사랑하는 아내와 병마가 싸우고 있었다. 요즘과는 달리 병마나 재앙은 거의 무당굿으로 풀어가던 때라 슬기로운 처용은 곧바로 밖으로 나와 춤을 추며 아내를 위로 격려하였다. 처용의 위로와 격려를 받은 아내는 마침내 병마를 떨쳐냈고 걸렸다하면 죽음에 이르는 마마를 물리쳤으나 그 슬기로 처용이라는 이름은 높아만 갔다. 그 후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임으로써 마마를 쫓아내는 주술적 힘을 빌었다. 이렇게해서 처용은 벽사신 즉 삿된귀신을 물리치는 신이 되었다. 종이에 그려붙이니 부적이 되었고 액을 안고가는 재웅이 되기도 하였다. 언제부턴가는 모르겠으나 처용이 병든 아내를 위로 격려하며 추던 춤이 벽사춤이되어 궁중에서 추어졌는데 이 춤이 바로 처용무인 것이다" 이춘걸 울산남구문화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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