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37회 "과학의 날"이다.
 매년 이맘 때면 초등학생을 둔 부모들은 자녀와 함께 고무동력을 이용한 글라이더나 물로켓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울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몇년째 각 학교마다 이같은 행사를 되풀이 해오고 있다. 아이들은 그저 "과학의 날"을 맞아 학교에서 내 준 만들기 숙제라고만 생각할 뿐 "과학의 날" 본래의 취지인 창의력 계발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필자도 초등학교 때 고무테엽을 이용한 이와 비슷한 기구들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비싼 돈을 주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 구입해 아빠와 함께 설명서대로 글라이더를 조립하고, 선생님과 함께 물로켓을 만들며, 미술학원이나 부모의 도움을 받아 과학 상상화를 그리는 식의 "과학의 날" 행사가 과연 아이들의 창의성 계발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과학의 날"의 의미를 한 번 되새겨 보자. 한국 최초의 "과학의 날"은 일제 강점기인 1934년 4월19일 제정됐다. 당시 조선의 선각자들은 과학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진화론으로 널리 알려진 찰스 다윈(Darwin, Charles Robert, 1809~1882)이 서거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이날을 제1회 "과학데이"로 정했다. 나라를 되찾으려면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였다.
 "과학데이"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김용관(金容瓘, 1897~1967)으로, 그는 1918년 경성공전을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지식인이었다. 그는 조국을 근대화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과학기술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 1924년 경성공전 동기들과 함께 발명학회를 설립했다. 이어 1934년 발명학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31명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중앙기독교청년회관(현 YMCA회관)에 모여 "과학데이"를 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 행사의 지도자인 김용관이 투옥됨으로써 더 이상 행사를 계속하지 못하다가, 과학기술처 발족일인 1967년 4월21일을 기념해 1968년 "과학의 날"로 정한 뒤 1973년 3월30일 이를 법률로 확정했다. 이후 정부에서는 이날에 과학기술상 시상과 유공자에 대한 포상을 하고 있으며, 각 지역 교육청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종 과학경진대회와 모형항공기 공작대회 등 행사를 실시해오고 있다.
 이처럼 정부가 과학기술 입국의 비전을 위해 과학기술처를 설립하고 "과학의 날"을 만든 지도 벌써 37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아직 기업과 공공 연구조직의 연계가 미약하고 과학기술의 확산을 위한 제도와 그 하부구조 및 환경도 전반적으로 미비한 실정이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이 지식기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학 연구기능의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지만 과학기술인력의 수급에 대한 탄력성이 낮은데다 첨단시설의 조기 확보가 어렵고, 여기에다 우수 인력의 이공계 기피로 기술혁신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나라의 기술혁신체제 성공 여부는 그 사회가 기술혁신과 얼마나 친화적이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정부는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문화 등이 새로운 기술변화를 수용할 수 있을 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특히 어릴 때부터 과학에 흥미를 갖고 친숙해질 수 있도록 과학체험교육 등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수년, 아니 수십년간 "과학의 날"에 반복돼 온 모형항공기 제작이나 물로켓 경진대회 등 요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진정으로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느끼도록 해주는 창의적이고 체계적인 과학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몇 년 전부터 울주군 상북면의 향산초등학교가 전국 규모 발명대회와 과학경진대회를 휩쓸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발명에 대한 의식 고취와 창의적인 사고력 신장을 위해 학생들에게 다양한 발명공작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시골의 조그마한 이 학교가 제37회 "과학의 날"을 맞아 더욱 대견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ijpark@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