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듬어진 공원. 온갖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고 그 아래 예쁜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노랗게 머리단장을 한 산새 한 마리가 힐끗힐끗 곁눈질을 하며 나뭇잎을 쪼아대고 있다. 바로 이 곳에 현충탑이 있다. 그 아래 얼룩무늬 모형 전투기가 누워 있고 비행기 날개를 약간 비켜서면 등나무가 드리워진 원두막이 보인다. 원두막에 앉으면 현충탑은 더 높이 올라간다. 가끔 이곳을 찾는 이유는 아침 산행 때문이다. 산행이라고 하니 거창한 등반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도심 가까운 이 곳 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서서 산길을 돌아오면 한 시간 반 정도면 족한 시간이다. 가다가 지인(知人)이라도 만나면 더욱 반갑고 이곳에서 살포시 젖은 등골을 원두막 기둥에 기대고 앉아 있으면 유년시절의 아련한 고향 풍경이 떠오른다.
 내가 살던 고향집 마당 옆에는 누런 흙 담을 끼고 길쭉한 화단이 누워 있었다. 화단엔 비가 그치면 더욱 생기를 찾던 봉숭아와 수탉 벼슬 같은 맨드라미가 있었고 얼굴 넓적한 접시꽃도 피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유난히 나의 기억을 꽁꽁 묶는 것은 난초 옆에 텁수룩 피어있던 무궁화 꽃이다. 잎만 무성했지 마지못해 핀 몇 송이 꽃일망정 비만 맞으면 할머니 젖가슴처럼 아래로 축 처져 도무지 꽃다운 생각이 들지 않던 그 무궁화. 거기다 진딧물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보기 좋을 리가 없었다.
 현충탑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내려오니 무궁화가 나란히 줄을 서 있다. 머지않아 무성한 잎과 함께 힘찬 꽃술을 뻗으며 은은하게 꽃을 피우리라. 꽃이 피면 이제 내 기억 속의 무궁화는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작년 추석 무렵, 고향 가는 국도에서 가로수로 서 있는 무궁화를 보았다. 요즘은 이곳처럼 가로수로 심어 둔 곳을 가끔 보게 된다. 이렇듯 나라꽃 무궁화를 많이 심고 가꾸자는 뜻에야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잎을 솎아내고 가지를 쳐서 억지로 키를 늘인 모습을 보니 그저 애처롭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수난과 함께 피폐되고 참혹한 시련을 당했던 꽃이 바로 무궁화다. 당시 무궁화를 ‘부스럼 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고 보이는 대로 뽑아 없애고 불태웠다고 하니. 인류 역사상 어느 특정식물이 이처럼 민족의 이름으로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이런 무궁화를 꼭 타조 형색으로 길가에 세워놓고 온갖 매연을 다 받아 마시도록 하는 것은 민족의 상징이요,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예의도 아닌 듯싶다. 애써 다듬고 분칠한 무궁화를 보고 있으니 천박한 여인의 짙은 화장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영 보기가 민망스럽다. 무궁화는 여느 꽃과는 달리 그저 가슴으로 느끼는 우리 민족의 혼이 살아있는 꽃이 아닌가.
 가로수라면 아무래도 키 큰 버드나무나 잎 넓은 플라타너스가 제격인 것 같다. 도심이야 은행나무도 좋고 히말라야도 좋지만 한적한 시골길 가로수로는 그 옛날 신작로를 따라 쭉 늘어 서있던 버드나무가 훨씬 더 정감이 가니 태생(胎生)은 속일 수 없나보다. 따사로운 여름 햇빛이 버드나무 잎사귀에서 반짝거리고 어디선가 바람 한 줌 휑하니 날아와 매미를 쫓던 그 신작로. 어쩌다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 행여 돌멩이라도 날아올세라 버드나무 몸뚱이 뒤에 숨어 있다가 얼굴을 살짝 내밀면 노란 먼지가 길을 따라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아련한 추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전쟁은 끝났어도 형님께서는 대형 태극기를 어깨에 두른 채 군대에 가셨다. 큰아들 저수지 못 둑 돌아 사라질 쯤, 어머니께서 치마 자락 걷어 눈시울로 가져가시던 그 날은 고향집 무궁화가 피어 있었다. 오늘 아침, 현충탑 아래 떼 지어 서 있는 무궁화를 바라보니 문득 진딧물 덮어쓰고 텁수룩 피어 있던 내 고향집 무궁화가 생각난다. 가로수로 둔갑하여 머쓱히 쳐다보던 그 무궁화도 말이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