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459돌)이다. 공은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적군 일본군을 크게 격퇴한 3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지리멸멸하여 무너지던 조선군이 대반격의 전기를 마련하게 하여 7년간의 전쟁을 결과적으로 조선군의 승전으로 마무리하게 하셨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459돌 탄신 국가기념일인 4월28일을 맞이하여 공이 전사하심으로써 나라를 구하신, 눈에 바로 보이지는 않으나 마음으로는 느껴지는 크고 깊은 나라사랑을 다시 새겨 보고자 한다.
 이 충무공은 일본의 침략이후 23번의 해전에서 23번을 모두 이긴 불세출의 영웅으로서 그 인물됨을 기원전 7천년부터 2차 대전까지 9천년 동안의 세계전쟁사를 다룬 "버나들로 몽고메리"의 저서 "전쟁의 역사"를 읽어보면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거북선)를 고안했다. (중략) 일본해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출중한 능력과 애국심으로 나라를 구하시고 세계전쟁사에서도 존경받는 전략가이신 공의 최후의 순간 죽음에 대하여는 석연치 않는 의문이 간다. 1598년 8월17일 임진왜란의 원흉 풍신수길이 죽자 왜적의 철군이 시작되었다. 공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지막 달아나는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다. 공은 밤새 독전하던 같은 해 11월19일 날이 샐 무렵에 뱃머리에서 지휘하던 중 왜군이 쏜 탄환이 공의 왼편 겨드랑이에 맞아 쓰러지시면서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마지막까지 왜국의 격퇴를 염려한 애국의 유언을 남기시고 전순(戰殉)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최고사령관이 전투의 끝 무렵에 적군이 잘 보고 총을 쏠 수 있는 뱃머리에서 독전을 하셨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공은 주위의 모함으로 인해 백의종군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변하지 않았으며 죽는 순간까지 위국헌신(爲國獻身)의 군인본분을 다하셨으나 종전 후에 불어 닥칠 승전에 대한 포상 보다는 또다른 모함이나 당파싸움을 경계하여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침으로써 정쟁의 회오리를 조금이라도 막아보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충정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공의 죽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최후의 순간에 손과 발에 못을 박히는 고통 때문에 실신한 상태에서 깨어나 정신이 나자마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저들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아련히 보게 된다.
 예수님과 충무공 두 분의 죽음이 다 같이 살신성인의 사랑을 실천하셨다는 데는 맥을 같이한다 하겠다. 비록 종교적 신앙심의 열정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충무공의 희생에 대해 너무 가볍게 추앙되고 있지않나 하는 점에 대하여는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보면 학교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 않는 학교가 없을 정도이다. 우리 어린이들은 충무공의 위업을 기리며 자란다. 학교교육이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효성이 깊고 애국심이 투철한 제2의 충무공, 제3의 충무공을 많이 배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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