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1. 염포는 조선조 초기에는 한일 무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지난해 염포 삼거리에 세워진 삼포개항비는 당시 염포가 두나라 교역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나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오늘날 염포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진설명 2 지난 4월 25일 울산만 여전에서는 울산과 키타큐슈를 잇는 돌핀호가 출항했다. 양국에서 하루 한번씩 출항하는 이 배는 과거 한일의 어두운 역사를 씻어주는 동력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울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염포동 일대는 울산이 공업단지가 되면서 가장 변화가 많은 곳이 되었다. 이곳은 울산이 공업단지로 지정이 되기 전 까지만 가리산과 천내산을 배경으로 동해안의 파도가 사철 고르게 밀려왔다 밀려 나가곤 했던 조용한 해변 마을이었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곳 해변에서 발견되었던 산수경석은 그 모양이 아름다워 수석 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한점씩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금 염포동은 세계적 기업인 현대 자동차가 들어서고 또 해안으로는 아산로가 달리고 있어 옛날의 아름다운 풍광을 많이 잃었다.

 최근 염포동 인근에서는 두가지 중요한 기념행사가 있었다. 하나는 지난해 9월에 있었던 삼포개항비 제막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올 4월에 있었던 울산∼키타큐슈의 여객선 취항이었다. 이 두 행사는 따로 열렸지만 울산으로 볼 때 이 두 행사가 갖는 의미는 크다.

 개항비 제막식은 600여년만에 염포의 역사를 다시 돌이켜 볼수 있는 기회를 염포주민들에게 제공했다. 삼포 개항비는 현재 염포 삼거리에 세워져 있어 이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볼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개항비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조선시대만 해도 이곳에 일본인들이 득실거렸고 또 한때는 이곳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난리를 일으키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염포는 조선의 포구로 신라때는 하곡현, 고려때는 지울주군사 그리고 조선때는 울산군의 관할하에 있었다. 이 지역이 염포로 불린 것은 옛날부터 이 지역에서 소금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염포진이 있었고 또 수군만호지가 주둔을 했다. 이렇게 보면 이 지역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국가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염포가 유명하게 된 것은 이곳이 개항지가 되면서 부터이다. 왜구가 우리를 괴롭힌 것은 아주 오래되었다. 이 때문에 신라와 고려 때는 왜구 때문에 조정의 걱정이 끊이지 않았고 고려말에는 이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펴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조정은 이들에 대해 회유책을 쓰게 된다. 조선은 건국 후 국방문제를 감안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태종 7년(1407)에는 부산포와 내이포 그리고 세종 8년(1426)에는 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해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따라서 조선은 이 삼포를 통해서만 왜인들이 드나들고 그리고 일단 교역이 끝나면 이들을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더욱이 해가 갈수록 우리 나라에 머무는 왜인들이 많아지면서 이것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중종때가 되면 이들에 대한 통제를 엄하게 하는데 이에 반발해 왜인들이 일으킨 난이 삼포왜란이다.

 조선 초기에는 염포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염포는 북으로 가는 왜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항구였기 때문이다. 당시 왜국 사절이 한양으로 갈 때는 염포에 도착한 후 언양·경주·안동을 거쳐 한양으로 갔다. 그러나 교역량과 또 왜인들이 머문 숫자는 부산포와 내이포에 비해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삼포왜란이 일어났을 때 삼포 중 왜인들이 주로 공격대상으로 삼은 항구가 부산포와 내이포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염포는 삼포왜란 동안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당시 염포가 다른 두 항에 비해 피해가 적었던 것은 부산포와 내이포에서 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대대적인 진압을 하는 것을 울산에 있는 왜인들이 보고 자신들이 난을 일으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보면 왜란이 일어났을 때 염포에는 36호에 120명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당초 조선 정부가 허락한 60명에 비해서는 두배가 되는 숫자이다.

 당시 왜란으로 염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나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 왜란으로 부산포와 내이포 첨사가 왜인들로부터 살해되고 1천여명의 조선인들이 살해되고 방화로 파괴된 가옥만 해도 2백여체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염포 역시 피해가 컷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은 염포를 비롯해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다. 염포 왜관이 폐쇄된 것은 1512년 조·일간에 임신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 시대 염포는 약 100년간 한일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염포가 개항지 역할을 중단하고 개운포·유포와 함께 오히려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수군 기지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 때 부터이다. .

 염포 주위에 성이 많다. 염포성은 둘레가 1039척이고 성내에는 우물이 3곳 있었다. 그리고 주위 가리산과 천내산에는 봉수대가 있어 군사기지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한일 관계에 이렇게 어두운 흔적을 남기고 있는 염포에 두 나라를 연결하는 여객선이 취항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지난 4월 25일 염포 인근의 애전(艾田)마을에서는 울산과 키타큐슈를 연결하는 여객선의 취항이 있었다. 애전마을은 성내마을의 남쪽 울산만에 접해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이곳에 쑥이 많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키타큐슈는 동북아시아의 항구도시며 물류의 중심지로 울산과는 닮은 점이 많다. 울산에서 키타큐슈는 항로로 123마일이다. 이번에 취항한 여객선은 평균 속도 41노트로 울산을 출항한후 3시간이면 키타큐슈에 도착한다.

 돌이켜 보면 이날 취항은 세종때 일본인들을 위해 염포가 개항된지 햇수로 꼭 5백76년 만이다. 그동안 한·일 관계는 밝은 역사보다는 임진왜란과 한반도 일제 강점 등 어두운 역사가 많았다. 이렇게 보면 염포 인근에 개항비가 세워지고 그리고 한일 여객선이 출항한다는 것은 과거 염포 주민들이 삼포왜란으로 당했던 아픈 상처를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리고 이번에 출항하는 여객선이 한·일 양국의 우호를 증진시키는 가교 역할을 해 나중에 우리 후손들이 염포 삼거리에 아름 다운 한·일 관계를 남길 수 있는 기념비를 세울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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