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년간의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좋게 기억되고 다시 만나 뵙고 싶은 선생님도 계시고 아픈 상처를 준 선생님,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 없이 거의 잊혀진 선생님도 계신다.

 필자의 고향은 경북 군위군의 가난한 산골마을이다. 마을에서 약 4㎞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일곱살에 입학해서 그런지 1학년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교실이 어디에 있었는지, 담임 선생님이 어떠하셨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성적표도 없어 잃어버린 세월이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일이 있다. 학년초에 담임 선생님은 환경정리를 위하여 아이들에게 빗자루, 걸레, 먼지털이 등을 가져올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는데, 당시 농촌은 모두 가난하여 손을 든 아이는 몇 명 없었다. 필자도 물론 손을 들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유독 필자에게만 힐난하는 투로 "너는 공부는 잘하면서 학교에 무얼 가져 오라고 하면 늑대처럼 가만히 있느냐"고 하셨고, 아이들은 "와" 하며 웃었다. 그때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하였는지 선생님이나 아이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부터 필자의 별명은 늑대가 되어 시골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따라 다녔으며, 도시에 있는 고교에 진학하면서 별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선생님이야 별 생각 없이 농담조로 말하였을 것이고, 금방 잊어버렸겠지만 필자는 오랫동안 상당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가정형편상 적성에도 맞지않는 공고에 진학하려는 필자에게 장학제도를 만들어 인문고 진학을 권유하여 오늘의 필자를 있게 한 교장 및 담임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사립학교의 특성상 중학교때 은사님들과는 지금까지 가끔씩 찾아 뵙고 테니스도 같이하는 등 아름다운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고교 시절에는 담임 선생님보다 교장 선생님이 더 기억난다. 워낙 무서웠던 분으로 아침에 교문에서 지각하는 학생을 직접 혼내시고, 수업시간에는 복도를 순시하시다가 졸거나 볼펜을 돌리는 학생을 보면 살금살금 교실로 들어와 막대기로 등짝이나 손등을 사정없이 내리치시던 분이시다. 담임 선생님 중에는 월말고사에서 당신이 가르치신 한문과목의 필자의 성적 98점을 실수로 바로 뒷 번호 학생의 성적 36점과 바꾸어 성적표에 올려 필자의 석차를 사정없이 끌어 내리신 무심한 분이 기억난다. 반면에 담임이 아니면서도 필자의 자취방에까지 놀러오시고,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와 좋은 말씀을 해주시던 총각 선생님도 계셨다.

 유신말기의 대학시절은 데모와 휴교 등으로 정상적인 수업이 되지 않았는데, 기억나는 분으로는 강의시간에 질문을 하였다고 그 다음 시간에 세워놓고 강의를 방해했다는 등 이유같지 않는 이유를 대시던 분(나중에 선배들에게 들으니 원래 그렇게 하여 질문을 막아왔다고 한다), 너무 악필이어서 읽기도 어려운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고 읽어내려 가시던 분, 강의시간 50분 중 20분은 인생강의를 하시고 30분 동안 법률강의를 하시던 분, 고시원에서 누워자며 공부하던 학생들을 안전을 이유로 쫓아낸 보직교수님, 지도교수라고 찾아갔더니 어느 과 학생인지도 모르시던 분, 한편 행정학과 교수이면서 이름을 기억하고 마주칠 때마다 격려해주시던 분 등이 계신다.

 학창시절의 아픈 기억들도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친구들을 만나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된다.

 요사이 스승의 날이 선물문제 등으로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들이 거북해 하고 심지어 수업을 하지 않고 하루 쉬기도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면 스승의 날을 학창시절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라도 같이 하며 지난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은사의 날"로 바꾸면 어떨까 한다. 스승의 날을 전후해서 담임 선생님을 모시고 반창회를 해보시라. 정말 뜻깊은 만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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