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가칭 부부의날(21일) 등으로 이어지는 미상불 가정의 달이다. 5월을 보내면서 그 유래와 오늘의 허실을 더듬어 보는 것도 결코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올 어린이날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반달"을 지은 윤극영 반달할아버지의 작품집(전집 2권)이 출간된 것은 여간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윤극영 반달할아버지는 일본 치하에서 이 어린이날을 제정하는데도 소파 방정환과 함께 앞장을 섰고, 우리말로 부를 동요가 없을 때 이 "반달"과 "설날" 등을 지어 우리 어린이들이 동심과 민족성을 함께 노래할 수 있게 했다.
 어린이날이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어린이들을 잘 보호하고 내일의 이 나라 주인으로 잘 가꾸자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어린이날에 어느 몰지각한 생부가 폭력으로 한 어린이를 그만 만신창이로 만들어 우리 마음을 어둡게 했다. 과잉 보호가 아니면 무지막지한 아동 학대가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1974년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개칭한 이 어버이날도 올해로 꼭 30년에 이른다. 낳고 기르고 가르친 그 은혜에 감사하고 부양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하는 이날 가슴에 카네이션을 단 어버이들의 환한 얼굴이 우리를 기쁘게 했다. 이 카네이션은 1910년 미국의 한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교회에서 흰 카네이션꽃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어버이날 역시 우리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필 이 어버이날에 부산 김모(41)씨가 치매 노모(65)를 낙동강 하구 을숙도에다 내다버리고, 그 노모가 익사체로 신판 고려장을 당한 것이다. 머리카락을 뽑아 신발을 삼아도 다 못 갚는다는 어버니 은혜이고 보면 유구무언일 뿐이다.
 1963년 학생들(JRC)이 5월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이 시초가 된 이 스승의 날에 제자들이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정경 역시 더없이 아름다웠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그 존경과 감사를 스승과 학생간에 올바른 인간관계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 우리를 더욱 기쁘게 했다.
 하지만 이 스승의 날 역시 이미 교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스승과 제자간에 참존경과 참사랑이 실종된지 오래여서 마냥 희망적일 수만은 없었다. 스승의 날이 "촌지 받는 날"로 인식되고 있는데다, 하필 이 날에 어느 자발없는 교사가 학부모에게 촌지를 강요, 부패방지위원회에 고발을 당한 것이다.
 지금 기념일이 너무 많아 유보중인 "부부의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만만찮은 것 같다. 부부야말로 모든 가정의 쌍두마차이면서도 부모와 자식들로부터 자유스러운 시간은 의외로 많지 않다.
 따라서 부부가 복잡다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둘만의 시간을 갖고 서로 위로하고 재충전할 시간이 당연히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가정의 달이 우리들의 소망과는 달리 적이 겉돌고 있는 아쉬움을 체험하곤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대책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가정이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다시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가정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공동생활체, 다시 말하면 부부가 자식과 부모와 더불어 공동생활을 하는 조직체이다.
 따라서 가정은 인간이 모든 최선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운명적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최소의 단위가 개인이 아니고 바로 이 가정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가정이 무너지면 이 사회가 무너지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도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가정은 이 사회의 처음 시작이자 마지막 보루로서 그 비결의 요체는 사랑과 존경이며, 이 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한 위와 같은 생부의 아동학대나 치매 노모의 고려장은 발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같은 5월의 그늘들은 거의가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금 실업률과 서민들의 생활고가 자못 심각하다. 국가는 가정이 붕괴되면 이 사회도 국가도 다 붕괴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실업 대책과 경제 살리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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