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 예측할 수 없는 죽음
암 판정 이후 관계에 대한 변화 느껴
가치있는 일·관계에 대한 고민 필요

▲ 정두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건강검진을 하다가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학기 첫날 아침에 핸드폰으로 병리 검사 결과가 악성이니 재방문하라는 문자를 받은 것입니다. 양성 결절일 거라 생각하며 여름에 연수를 나가기 전에 확인하려는 마음으로 받은 추가 조직검사에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급히 수술 일정을 알아보고 다른 일정을 조정했습니다. 병리학적으로 암이지만 예후가 좋은 편이고, 수술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건강 상태나 생존율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암’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는 여전히 무겁습니다. 특히 누나가 만 40세가 되기 전에 5년 생존율이 20%보다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암 진단을 받고 4년 뒤 떠났으니까요. 수술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런 확률을 예상하지는 못했는데 병리 소견에는 매우 운이 없는 결과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제 경우는 10년 뒤에도 살아 있을 확률이 1~2% 정도 줄어드는 정도라 매우 다른 상황입니다. 수술 뒤에도 같은 진단이라는 가정이 있지만 말입니다.

의료 전문가가 아닌 주변사람들에게는 작은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증상이 없이 활발히 지내던 부서장이 갑자기 암수술 때문에 일정을 조정하자고 하니까 걱정이 될 것입니다. 지도교수의 도움이 필요한 대학원생들은 더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질병의 이름은 암이지만 실제로는 수술 받고 원래 살던 대로 살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학생들과 대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사고로 지도교수가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자동차, 비행기 사고만이 아니라 지진이나 압사사고도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버스 사고 뉴스를 보고 놀랐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수학여행을 간 여중생들이 버스사고로 9명이 죽고 30여명이 다친 사건입니다. 누나가 갔던 수학여행입니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다 자막 속보를 보고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며 초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누나가 탔던 차의 바로 앞 버스가 추락했다니 어쩌면 더 일찍 누나를 잃었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라는 뜻이죠.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생명이 끝난다는 것이죠. 그 시점이 한참 뒤에 있을지 매우 가까울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만약 내가 누나의 경우처럼 4년만 더 살 수 있다면, 나는 다르게 행동할 것인지 잠시 고민해봅니다. 모아둔 돈을 다 써서 비싼 물건을 사거나 여행을 가는 것은 어떨까요. 부족하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진료를 보고 강의하고 글을 쓰며 연구를 고민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직장의 일에는 변화가 없는 반면에 관계에서는 변화를 느낍니다. 특히 가족에서 그렇습니다. 아내 또한 암에 관련된 직업을 가졌던 사람이라 제 경우는 생존과 기능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과를 알기 하루 전인 주말만 하더라도 제가 얘기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날 암 소식을 전하며 죽음을 떠올리니 주말에 제가 했던 이야기가 비로소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은 항상 우선순위가 밀렸던 것 같아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일주일 뒤 예약되어 있던 부부상담 시간에 좀 더 깊이 있게 다뤄보았습니다. 아내는 이제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통에 서툰 아내와 감정에 민감한 남편이 서로를 조금 더 알게 된 것이죠. 아내가 아이도 놀러간 날이니 남편이 보고 싶다던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합니다. 신혼 때 영화관에서 다툰 후로 십년이 지나서야 다시 간 것입니다.

사건과 사물에 대해서는 유사한 취향을 가진 우리 부부는 처음에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삐걱대며 결혼식 전부터 커플상담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간극이 해결되지 않았고 둘 다 바빴습니다. 충돌이 잦아지며 수년 전에 남편이 이혼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아내는 소장을 송달받고 나서야 이혼을 원한다는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여러 번 의사표시를 했고, 변호사의 조언대로 협의를 제안한 후에 재판을 진행하니 수임료를 지불했다는 것을 알려줬는데도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이 남편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으며 부부는 힘들었던 것이죠. 새로운 치료자와 부부상담을 시작해서 수년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으니 해피엔딩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일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도 저는 지금, 여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온 것 같습니다. 죽음이 언제 찾아오더라도 말입니다.

정두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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