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슬픔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 한 목숨 희생한 충신의 정신과 왕의 심장에 비수를 겨눈 반역자들의 비극적인 종말은 기록해도 그 이면의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은 행간에 묻어둔다.
 행간에 묻힌 슬픔은 살아남은 자와 그 사실을 기억하는 자의 몫으로 온전히 남는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 기술과 다른 방식으로 그 사실에 접근한다. 인간적인 연민과 상상력으로 쓰여진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보다 감동적인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다.
 울산과 경주를 경계짓는 치술령(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은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인 공간이다. 치술령 초입에 세워진 "치산서원"까지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신라 충신 박제상이 주인공이다.
 치술령은 그러나 산 바로 아래 "망부석"을 가리키는 표지판부터 우리를 신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곳부터는 박제상 아내가 주인공이다. 왕의 동생을 구하러 일본으로 간 남편 박제상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고 그 혼이 새가 돼 바위굴에 숨었다는 아내의 신화는 박제상의 충절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조선의 실학자로서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성호 이익(1681~1763)의 마음도 이와 같았을까. 그는 치술령을 소재로 두 수의 시를 지었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에 전하는 박제상 이야기와 그의 높은 충절을 시로 읊은 "우식곡(憂息曲)"과 남겨진 박제상 아내의 애처로운 마음을 노래한 "치술원("述怨)"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치술원"이다. 시적 소재로 남편을 잃은 한 여인과 그 여인의 한 맺힌 심정을 시의 전면에 부각하면서 충·효 같은 유교적 가치관을 주로 다뤘던 이전과는 또 다른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여자로 태어나면 충신 아낙은 되지 마라/낭군이 충성하면 의지할 곳 잃고 마니"로 시작한다. 이것은 충신의 아내가 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했던 조선의 유교적 이념에 상반된다.
 더 나아가 이익은 신라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만이 돌아오는 장면을 "뼈 태우며 기다린 소식, 참인가 거짓인가/내 님은 못 오시고 왕자만 왔다 하는구나/슬프도다"고 표현하는 등 남편 잃은 여인의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시의 무게중심을 둔다.
 박제상의 아내는 멀리서 배가 오는 것을 보고 남편이 오는가 싶어 한걸음에 달려간다. 그런데 눈물로 기다리던 남편은 오지 않고 왕자만 살아서 돌아온다. 동생을 만난 왕에게는 기쁨이지만 아내에게는 슬픔이다. 상반된 감정이 한 공간에서 터져나오지만 아내의 슬픔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한 시인의 말대로 신화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왕이 아우의 귀환을 맞아 우식곡을 짓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치술령에서 두 딸과 함께 바윗돌이 되고, 그 넋은 새가 돼 국수봉의 바위굴에 숨었다는 이야기는 신화로 승화돼 지금도 치술령을 찾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추억되고 있다.
 치술령 정상을 300여m 남겨둔 지점에서 울산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된 "망부석"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규모가 엄청난데 놀라고 망부석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데 의구심이 든다. 현재 치술령에는 울산시와 경주시가 지정한 2개의 망부석이 두 자치단체의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지점에서 공존하고 있다.
 망부석에서 우연히 만난 등반객 부부는 망부석의 이같은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했다. 남편이 "망부석이 사람 형상을 닮지도 않았고 또 내륙을 보고 있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하자,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마음이 상해 돌아선 모양이예요"라고 응수했다. 헛헛한 웃음과 함께 치술령 정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상에서는 동해 바다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온산 앞 바다에 들어선 공장들이 배출하는 연기만 아니면 동해 바다가 더 선명하게 눈 앞에 펼쳐질 듯 했다. 역사라는 버거운 짐을 벗어놓고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수평선을 바라본다. 나라를 위해 가족마저 외면했던 남편과 그를 그리워하며 돌이 된 그 아내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펼쳐졌던 이곳은 치술령이다.
 성호 이익이 울산에 왔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시 "치술원"의 "치술령 꼭대기서 아침노을 바라보네/노을은 왔다가는 다시 가지도 않는데"라는 문구를 통해 그의 방문을 추측할 수 있다. 설령 실제 오지 않았다 해도 치술령은 그가 시를 남길 정도로 매력적인 공간이었음은 분명하다. 서대현기자 sdh@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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