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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집안서 출생 유년시절 울산서 보내
2006년 05월 23일 (화) 경상일보 webmaster@ksilbo.co.kr
   
 
3. 박영인은 울산 사람이다 (끝)

양사초등·부산중 거친뒤 일본으로 유학
한때 현대무용 한국보급 시도하다 좌절
가족·국적 떠난 자유인…예술혼 불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장을 갖춰 입고 공연장을 찾아올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는 한 한국 무대에서 활동할 수 없다



박영인(쿠니 마사미)의 출신에 대해서는 그동안 논란이 있었다. 일부 기록에는 그가 한국의 부산 또는 경상도에서 태어났다고 쓰여있으나 무용학계에서는 검증 불가능을 이유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내 현대무용사를 개괄한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2001년)은 박영인을 경남 출신이라고 기록했다. 무용인 김매자씨의 <한국무용사> 등 대다수 국내 서적들은 그의 출신을 명시하지 않거나 한국인이라고만 적고 있다.

반면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의 <서울 육백년사(六百年史)>와 울산시 동구청 홈페이지는 박영인이 울산 출신이라고 자세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박영인이 쿠니 마사미와 같은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국내 무용계 원로 정병호(80) 중앙대 명예교수는 "쿠니 마사미(邦正美)가 박영인이고, 그가 한국인에 경상도 출신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본인이 밝히지 않는 한 검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 명예교수는 "그동안 여러 말이 있었지만 단지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쿠니마사미씨가 '내가 왜 한국인이냐'고 반문할 경우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무용인 현희정(51)씨에 따르면 원로 무용평론가 조동화(84)씨는 박영인을 부산 출신으로 알고 있었다. 박영인이 부산중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정작 그의 고향은 몰랐던 셈이다.

그러나 최근 박영인의 넷째 친동생 박영철(81·동강병원 이사장)씨가 쿠니 마사미가 자신의 친형임을 증언하면서 그의 출신에 대한 논란은 더이상 무의미하게 됐다.

박영철씨는 "일본으로 귀화한지도 오래됐고, 연락도 거의 없어 지금까지 그(박영인)가 큰형이라는 사실을 나서서 밝힐 이유가 없었다"며 "무용인으로 한국은 물론 일본과 독일에서도 꽤 유명했다"고 말했다.

박영인은 1908년 울산시 중구 학산동 122번지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울산에서 보냈다. 아버지 박남극(朴南極·작고)옹은 1900년대 초 울산에서 면장을 지낸 인물로 열렬한 개화파였다. 울산 출신 동요시인으로 '봄편지', '눈꽃송이' 등을 남긴 서덕출(1906~1940) 선생의 어머니 박향초씨가 박남극씨의 여동생이었다.

박영인은 울산 양사초등학교를 다녔다. 올해로 개교 99년을 맞는 양사초등학교는 해방 이후 학적부만 보관하고 있어 그의 학적부를 살펴볼 수는 없으나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영특해서 성적도 우수했다고 한다. 부산중학교와 일본 구 마츠에(松江) 고등학교(현 시마네대학)를 거쳐 일본 최고 대학인 동경제국대학에 진학한 걸 보면 충분히 입증이 된다.

박영인은 1930년대 중반 독일 유학 전 몇몇 후배들과 부산에서 공연을 했다. 아버지 박옹은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그의 이국(離國)공연을 지켜봤다. 개화파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춤추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 후 그가 일본에서 간혹 소품을 구해달라는 연락이 오기도 했는데 박영철 이사장은 "무당옷과 칼 등을 구해서 보내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박영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이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귀국했다. 박영철씨는 "아버지 박옹과 함께 마중하러 갔었다"면서 "그 이후 해방 때까지 몇개월간 울산과 서울을 오가면서 문화활동을 했으나 춤 추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의 내로라하는 무용인과 무용계 후배들이 우리나라에 현대무용을 보급시키자면서 박영인과 여러번 회합의 자리를 가졌다. 그에 대한 국내 무용계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박 이사장은 "당시 그의 유명세는 대단했다"며 "서울의 무용계는 물론 예술계에게 그를 초대해 모임을 갖고 한국 예술의 부흥을 부르짖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박영인이 한국에 남아주기를 원했지만 본인은 거절했다. 박영철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장을 갖추어 입고 공연장을 찾아올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는 한 한국무대에서 활동할 수는 없다고 말했었다"고 회고했다. 무용계에서 여러 차례 설득이 있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해방 뒤 박영인은 홀연히 한국을 떠났다. 아버지 박옹만이 부산까지 배웅했다.

박 이사장은 해방 이후 10여년전까지 그로부터 2통의 편지를 받았다. 2통 모두 발신지는 없었다.

첫 편지에는 자신은 가족, 형제, 부부관계 등을 완전히 떠난 사람이라며 집안 일을 당부했고, 두번째 편지는 보내는 사람의 주소없이 미국에 잘 살고 있으며, 많은 나이에도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위해 가족도, 국적도, 결혼도 포기할 만큼 예술만을 위해 살았던 그는 지금까지 한국과의 연락을 끊은 채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서대현기자 sdh@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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