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평 억새 -이상태신불산 몸을 푸는 바람 잡고 서성거리다뒤채는 노을 따라 이슬 빗긴 날개 마다하얗게 절로 불린 속 때 지문마저 벗긴다가을숲을 닮은 바람이 갈 듯 말듯 머뭇거린다. 산억새와 물억새가 흰머리 봉두난발 한 채 하늘 물을 길어다 녹슨 칼을 간다. 불새의 날개 위로 날을 세워 하얗게 내린 이슬을 서걱서걱 베어낸
살점을 뜯어대도 아프지 않았겠다날마다 두 손 모아 부빈 정성이었으니사라져 흔적 없어도 슬프지 않았겠다 살을 깎는 고통이 왜 없을까.아픔을 참고 견디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삼백육십오일 성스러운 비손으로 기도하는 정성을 알기에, 내 한 몸을 내주고 오만하게 들러붙은 그 때를 상처없이 녹여준다.그 어떤 희생도 감내하자 싶었겠다. 세
칼바람에 깜짝 놀란 비둘기의 날갯짓몇 밤을 파르르 떨며 다문 입이 말랐다푸른 날 던져진 나처럼 찢겨 온 첫 시집 깊은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다 시퍼렇게 날을 세워 치훑고 내리훑고 불어대는 왜바람은 ‘비둘기 날갯짓’. 주인을 찾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들부들 떨며 되돌아온 우편물, 시인은 지나간
대나무 - 김동관단단히 매듭지은 뿌리가 누워있다허공으로 뻗지 못한 그림자는 비어있고아버지 고관절 위로 댓잎들이 쌓여간다대나무 뿌리는 땅속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늘 흙을 밀어내고 옆으로 뻗어가면서 한 해에 한 번만 불쑥불쑥 솟아오른다.앞바람에 왕대가 곧게 자라나 위를 쳐다보며 중심을 잡아준다.뿌리로 누워있는 시간은, 자
지구 위 8cm에서 2cm로 내려왔다휘청거리던 발목이 부드럽게 활강한다여기서 사는 동안은 흔들리지 않겠다높은 굽이 낮아졌다. 휘청휘청하던 발목을 쉬게 하려고. 가슴이 쓰렸겠다. 세상에 값없는 물건이 어디 있고, 바람 없이 흔들리는 나뭇잎이 있을까. 내려서기로 작심을 했지만, 사실 버티어 보기도 했을 터. 재나 마나 스스로 내려앉는 일은 쉽지 않은 일. 이
왜가리 한곳 앉아 낚싯대 들여놓고물거울에 비추어진 제 모습 바라보다피라미 놓쳐버린 채 저녁노을 읽는다철새 왜가리가 텃새 되어 산다. 왜가리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인 듯, 하루하루 살아 온 이 시대의 그런 사람.힘 빠진 어깨죽지 곧추 세워, 잡지 못 할 물고기를 낚는 그대. 이글이글 불타는 저녁노을 등에 이고, 구만리 하늘을 다시 비행하고 싶다. 시조시
우아하게 점프 뛰는 그림자의 기분으로어제와 오늘을 잇는 말 내일바닥에 휘갈겨 쓴다 지우면서 다시 쓴다사람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물과 다르다. 높은 곳으로 끝없이 올라가려고 발돋움하며, 언제나 무엇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 기품 있고 아름답기만 바란다. 지나간 어제의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고 다가올 미래는 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바람으로 내면의 한
쉽게는 내 잔등이 부러지지 않는다따가운 햇볕 아래 뼈대 굵은 집안 내력아버지 나들이 친구 청려장靑藜杖을 챙기신다쉰살 생신을 맞은 부모에게 아들이 명아주로 효도 지팡이를 만들어 선물했다. 아버지는 ‘뼈대 굵은 집안 내력’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등을 구부릴 수 없었다. 아들이 준 그 지팡이, 집에서는 문지기가 되고 집 밖에선 든든한 도우미 되어 아버지의 노년을
길을 찾는 너에게 - 조안버드나무 가지가 허공에서 걷고 있다굽고 휘어지고 엉키고 뒤틀리고쭉 뻗은 길만 길이 아니다 네가 가면 길이다 버들은 물을 좋아한다. 이리저리 비바람을 견뎌가며 가지들을 키워 하늘 허공으로 내 보낸다. 사람이나 나무나 살아가는 삶이 어쩌면 한 권속 같기도 하다.길도 휘지 않고 곧게만 뻗을 수 없다. 수천 수 만개의 길 중에 하나를 선택
수련 - 손영자엉덩이 하나쯤이다 그만큼의 자리다어젯밤의 만월과 아침에 떴던 해의엉덩이 잠시 내려놓고 쉬었다간 자리다 아침잠에서 깨어 금방 세수하고 마당으로 달려나온 어린아이 같은 꽃, 수련이다.맑고 앙증맞은 그 아이가 해질녘엔 졸린 눈 부비며 집으로 돌아온다. 잠자리에 들 듯 꽃잎을 오므리는 그 모습 때문에 꽃이름에도 졸음 수(睡)자가 붙었나보다.볼살 오른
언제쯤 저 바위가 기다림을 완성하여솥뚜껑 들썩이며 밥 냄새 풀풀할까내 고향 청자 빛 강물, 기다린 듯 반기네* 솥바위 : 의령의 관문인 남강 정암루에 있는 바위가뭄에 강물이 줄면 육중한 솥바위를 지탱하고 있는 세 개의 발을 볼 수 있다. 솥바위는 소망바위라고도 한다. 지난 날 농번기에는 큰 가마솥에 일밥을 지었다.구수한 밥 냄새가 새벽 강에 물안개처럼 가득
내 방에 갇힌 우울을 비춰보던 거울 한 척물빛을 하늘빛을 서늘하게 가르더니떠난다 맑은 샛강에 나를 싣고 출렁이며 오래도록 함께 했던 물건이 갑자기 깨지면 한 조각 내 마음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금무늬가는밤나비’가 두 공간을 갈라놓은 듯 아차, 조각 난 거울에 걷잡을 수 없는 마음 하나 담아 보낼 때
우지마라 산다는 게 알고 보면 벼랑이다짙푸른 저 결기를 결코 잊지 않으며시퍼런 절벽에 산다 출가도 못하는 허공 해풍을 온몸으로 품고 살면서 가끔은 가파른 벼랑 끝에 선 자신이 몹시 지쳐 혼자 울다 휘파람으로 승화시킨다.바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파도 팔매질에, 덮쳐대는 심술이 어제오늘이 아니다.곰솔은 푸름을 꺾이지 않고 한결같은 낙랑장송으로 우직하게 외길을
물때가 물길을 내며 마음을 침범할 때눈뜨자마자 눈감는 곳 서자마자 구부리는 곳계절은 문장보다 행간으로 모서리는 자란다 ‘줄눈’의 사전적 의미는 ‘벽돌을 쌓거나 타일을 붙일 때, 사이사이 모르타르 따위를 바르거나 채워 넣는 부분’이다.자유와 평안을 갈망하는 일상에서 모두의 만족을 위해 공간을 공평하게 나누는 경계선과 같다
사는 게 죽는 것이고 죽는 게 사는 거라고내처 허방 밟고 낙담하고 있을 때낙엽 속 헤치고 나온 어린 싹이 일러 주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한 두 가질까. 누구나 사는 방법이 다르거니와 가는 길도 각기 다르다.‘죽고 살다’와 같은 표현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어느 절벽 끝에서 더 나아갈 수 없어 절망할 때 물 한 방울 없는 바위와 바위 사이에 쌓인 낙엽
아버지 베옷 입고 하늘 길 떠나시며내가, 맨발인 내가 따라오지 못하도록평생의 빈 소주병 부숴 천지사방 뿌리셨네 밤하늘에 제 이름으로 반짝이는 수천수만 별을 바라보며 시인은 아버지를 그린다.먼 길을 가면서도 자식을 염려하는 그 마음을 부모가 되고서야 깨달았다.이 땅에 온 모든 생은 소중한 인연으로 만났지만 언젠가는 그 생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눈 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5월의 푸른 하늘 아래 조용히 벙근 모란, 올 때 이미 떠날 것을 마음에 두고 왔을까. 만 길이나 높고 깊은 곳에서 깨끗이 길어 올렸다가 이내 지는 모란꽃. 어느 봄날 아무런 말도 없이 왔다가 무심히 꽃잎을
봄 속으로 비가 오고 비 속으로 봄이 오니비는 봄이 되고 봄은 또 비가 되어봄비란 합성어 하나 새싹처럼 솟는다. 언 땅에 온기를 지피는 ‘봄’과 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는 ‘비’. 둘이 하나 되어 오랜 단짝이 된다.여기 이 봄은 우산도 쓰지 않고 금방 개울로 달려가 돌다리를 말갛게 씻어놓고, 산길을 자박자박 걸어 가 잠자
내 밑천 오 원인데 십 원인 척 하였느니십 원짜리 되려다가 빈 지갑이 된 것이지얼만 줄 말하지 않아도 남이 먼저 아는 걸. 누구나 세 가지 척을 모시고 산다.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이런 것들이 사람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때에 따라 당당하게 세워주기도 한다.실속 없이 내보이기 좋아하는 그런 허세라는 말, 없으면
밤새도록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하얀 아침누군가 나는 누군가 발가락이 저리다아무도 잡을 수 없는 빈 시간 그 언저리 바람은 우리가 가지 못하는 곳을 오간다.때로는 광대처럼 때로는 어린아이 걸음처럼, 세상 안팎에서 공존한다.긴 밤을 달려온 아침 ‘누군가 나는 누군가’ 선문답을 던진 화자는 부르튼 발가락이 아프다는 말보다 시리다는 말을 바람에게 건넸다.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