쌉싸름한 흰빛인가, 쓴내 나는 가시 울은미로 같은 가지사이 해진 기억 지나가고할머니 콧물이 묻은 손수건 빛 꽃이 폈다 탱자꽃은 무수한 가시 사이에 핀다. 종달새가 날아와 꽃잎에 세수를 하고 포르르 날아가는 봄날. 어쩌자고 여린 꽃이 가시를 감싸고 제 피를 걸러 향기를 길어 올리는지.쌉싸름하고 아련한 꽃에서 시인이 건져올
끊어내어야겠구나 끊어버려야 하겠구나끊어낼 수가 없구나 끊어낼 길 없구나대가리 높이 쳐든 채 꼬리 잡힌 저 코브라 ‘높이 쳐든’ 코브라의 ‘대가리’는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욕망, 그 가운데서도 자기를 내보이려 하는 현시욕(顯示慾)이다.‘끊어 낼 수’도, ‘끊어낼 길’도 없는 이 욕망, 시도 때도 없이 대가리를 불
물소리를 읽겠다고 물가에 앉았다가물소리를 쓰겠다고 절벽 아래 귀를 열고사무쳐 와글거리는 내 소리만 들었다 물가에 앉아 물소리를 읽고 시심을 틔워 글을 쓰고자 한다. 낭떠러지 험한 길 내려와 자리를 잡았을 때, 비로소 읽고 쓰는 작위가 부질없음을 깨닫는다.‘사무쳐 와글거리는 내 소리만 들었다’는 진술은 얼마나 도저한가. 시끌벅적한 것은 물소리가 아니라 내 안
사람 없는 다 저녁 비질은 왜 하나요절뚝이며 웃는 거사 우리 있어 그랬나어쩌나 숨어 있을 걸 고요만 쓸려갔네. 산사의 저녁은 고요하다. 수행자든 거사(居士)든 절 마당에 빗질은 자신을 일깨우는 일이다.티끌 하나 없이 정갈하게 쓸어가는 물결무늬는 물처럼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기 위한 마음가짐.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도
아내는 자신보다 프리지어를 앞세우고퇴근하는 나를 반기는 재치가 밉지 않다꿈같은 신혼시절로 가끔 우린 그렇게 ‘노란 꽃’ 한아름 앞세운 아내가 화사한 얼굴로 퇴근한 남편을 맞는다.아내를 향한 무한애정을 프리지어 뒤로 살짝 감췄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밉지 않다’는 시인의 재치가 한 수 위다. 부부는 억겁의
빼어난 잎새 에다 눈썹달 이워 놓고바람 한 술 불러들여 여백 위에 풀어 두면먼지로 쌓인 소음을 난향 풀어 걷어 낸다 난(蘭)잎이 완만하면서 날렵한 듯 부드러운 곡선은 한국적 미로 일컬어진다.먹을 듬뿍 적신 붓으로 두드러지게 그린 난초, 달의 맑은 빛에 불러들인 바람, 그리고 여백에 풀어둔 향기, 한 폭의 춘난은 봄밤을
어둠이 단추 푸는 뱃고동 기침 소리눈곱 뗀 저인망선 어깨가 출렁인다시퍼런 갈기를 세우며 펄떡이는 생애들 어부는 단잠을 물리고 바람이 거셀지 파도가 높을지 첫새벽 별을 둘러보며 출항을 서두른다.칠흑 바다를 깨워 불빛 하나 의지해, 망망대해에서 파도와 싸워가며 만선의 쌍끌이를 내린다.새벽을 열어 한가득 그물을 올리는 순간,
둘이 한곳을 바라보는 게 사랑이라면글쎄 나는 싫겠다 나란히 가기만 한다면엇갈린 한순간이라도 좋으리 만나기만 한다면 기차와 철길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관계지만, 곧기만 할까. 얽힌 철로 위에서 제 선을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와 같다.오직 둘 사이의 공통분모는 ‘사랑’, 그러나 맑았다 궂었다 때로는 천둥번개로, 한결같을 수는 없는 것이 사랑이
정갈한 언어로도 덧칠하지 말 일이다그대 숨결 사이마다 맑은 마음 그득하니이대로 마냥 이대로 긴긴 날의 눈 맞춤을… 눈속에 핀 매화는 세속을 초월한 듯, 향기는 깊고 맑아 티끌만 한 거짓 없어, 그 어떤 언어로 치장하지 말라고 시인은 경고하듯. 사람의 손으로는 빚지 못할 일! 생명의 꽃을 피우는 일이다.겨우내
송아지랑 어미 소가 집으로 돌아가는갓길 없는 시골길 짐 진 노인의 꽁무니엔경적도 울리지 않고 뒤따르는 車 車 車 한짐 가득 짊어 진 노인의 어깨 위로 하루를 정리하는 햇살 한 줌 더해진다. 일과를 마친 누렁소와 어미 옆을 따라가는 송아지. 정겨운 시골길은 느릿느릿 여유로움 가득인데, 비켜 걸을 갓길은 한뼘 조차 없다.마음은 조급해도 행여 날아갈까 붙잡고 싶
바닷길 등대처럼 깜박이는 홍시 한 개그 불빛 반기면서 기러기 찾아들고빈 들녘 허수아비는 수신호를 보낸다 농부는 내 것이라고 다 가져가지 않는다. 서리 맞은 겨울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새빨간 홍시 속에 농부의 마음이 담겨 있다.낮은 가지는 길 가는 이 맛보라고, 높은 가지는 날짐승의 먹이로 남겨둔다.그 심성을 닮은 듯 구만리 하늘길을 찾아 온 기러기떼
해무에 늘 담이 젖는 바닷가 독가촌설 아침 색동 햇빛 텅 빈 작은 마당가끔씩 열었다 닫는 옹이 많은 마음 하나 클레멘타인(‘Oh my Darling, Clementine’)은 미국 서부의 민요다. 넓은 바닷가 안개가 자욱한 집에서 이주해 온 광부 아버지와 딸이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딸을 잃은 아비가 목 놓아 딸을 부른다. 천륜
먼 훗날 잊어버릴까 한낮에 잠깐 오셨나올올이 분홍 살갗, 젖은 볼을 만지며연필로 받아쓰다가 놓쳐버린 내 스무 살 ‘첫눈’ 앞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적막처럼 조용히 다가와 서서히 멀어진다.사라지는 순간마저 부디 잊지말라며 새 하얀 여운을 남기고 돌아선다.발그레한 볼을 어루만지며 기다리던, 고이 접은 그 날의 추억
하얀 미소 살가운 손길 믿어도 되는 걸까살은 죄다 발라먹어 앙상한 저 해안선을날마다 다시 핥고 가는 그 속내는 무엇일까 파도는 마음을 감춘다. 게다가 제 기분대로다.은구슬을 담은 듯 반짝거리다 때로는 넓은 치맛자락 같이 넘실거린다.하지만 방심은 금물. 살인미소(殺人微笑)로 다가오는가 싶은 순간, 물기둥을 세워가며 산더미로 달려 와 덮쳐댄다.파도에 씻겨간 해
오 남매 가슴에 품고 젖 물려 키워주신우리 어매 돌아가셔도 착한 밥 되셨는지함박눈 소복이 담고 선영에 누워 계시네.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면 울컥 어머니가 그립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딸 다섯을 키우려 한시도 쉴 틈 없이 바쁜 날들 보내셨다.자꾸만 허리끈 졸라매던, 그 억새 손의 아련한 기억. 어머니가 좋아하던
할아버지 힘들게 버스에 오르시자재빨리 갖다대는 할머니의 승차카드잔액이 부족합니다 아찔하다 인생! 아찔한 순간은 수없이 많다.한 생을 경영하는 동안 이런저런 일로 벼랑 끝에 설 때가 어찌 한두 번일까.노부부가 겪는 낭패가 그야말로 아찔하다. 금액이 부족하다는 멘트를 듣고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모두들 사는 게 바쁘다고, 힘들다고 아우성이다.부모를 못
청춘을 짊어지고 가쁜 숨 몰아쉬며산모퉁이 돌아와도 쉴 수도 없던 인생어느새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 갑니다. 인생무상이랄까. 젊은 날 머루알처럼 맑고 까만 눈, 배냇짓 하던 어린 것의 재롱도 잠시, 고지를 찾아 바삐 달려왔다.깊은숨 헐떡이며 어느 지점까지 가면 쉬겠지 했던 생각뿐, 단 한 번 쉴 수 없이 달렸다. 자식들 대학등록금, 또 취업걱정에 하루도 마음을
가을 색 짙은 들녘 쑥 향이 그윽하다귀한 줄 모르는지 찾는 이 없는 둑에무서리 내릴 때까지 보란 듯이 푸르리 그는 빈 무대에 우두커니 서 있다. 연극도 이미 끝난, 객석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 싸늘한 공간에서 왔다갔다한다.엊그제 같은 지난날 각광받던 존재감, 그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배역 없는 화려한 백수인 현실을 못 믿겠다는 듯 무
짱아는 빈 하늘에 동그라미 그려보고한가위 보름달은 나를 보고 웃는 시간폭염에 시달린 호박 속살 가득 찌고 있다 한가위 명절연휴가 지나갔지만 그 여운은 아직도 집안 곳곳을 맴돌고 있다. 동녘에서 유달리 밝은 달이 두둥실 뜨는 보름날에는 어머니들이 두 손 모아 그 해가 다 가도록 가정 안팎이 무탈하기를 소원했다. “더도 덜
사람들 바삐 오가는 횡단보도 귀퉁이에할머니와 푸성귀 몇 줌 정물화로 앉아있다더께 진 석비레 손등의 도두친 삶이 붉다 모닥모닥 푸성귀를 끌어앉고 길모퉁이 차지하신 할머니. 갈대 마른 꽃잎을 머리에 인 채 나른한 오후를 소리없이 보내신다.정물화 속 박제 된 존재처럼 오두커니 앉아있다.한무리 다가오는 행인들 인기척에 슬며시 연동하는 할머니의 두 손등. 순간 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