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읍 법정동인 중리(中里)는 정조 때 내지지리(內知止里)와 외지지리(外知止里) 욱곡리(旭谷里)로 갈라졌다가 1894년(고종 31) 망성동(望星洞)과 욱곡동(旭谷洞)이 분리되어 나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사동(內沙洞)의 일부를 합하여 중리(中里)라 하였다.

 중리와 두동면 만화리 경계에는 높이 602m의 국수봉(國秀峰:菊秀峰:國讐峰:국충산:국수산)이 있다.

 그러나 국수봉의 어원은 국사봉(國祀峯)에서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나라에서 산천에 대한 제전을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3대 제사로 구분하여 시행하였다. 이 3사에 들어 있는 산신당(山神堂)에는 나라에서 관리를 내려보내 치제(致祭)하였는데, 이를 국사산신당이라 불렀고 약칭하여 국사당(國祀堂)이라 했다.

 후에는 일반 산신당에까지 이 이름이 붙게 되어 산신당, 즉 국사당이 있는 주봉을 국사봉(國祀峯)이라 했다. 국사봉을 國士峯이나 國師峯으로도 서칭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설을 미루어 본다면 국수봉이라는 산 이름도 산신당이 있었던 국사봉이 와전 변화하여 생긴 이름인 듯 싶다.

 원시사회에서는 자연숭배의 토속신앙이 발전하였다. 늘 산과 가까이 살아가는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숭산(崇山)사상이 있어 산을 신성시하고 거기에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국사봉은 이같이 신인 하늘과 땅인 인간이 만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국사"는 신성한 곳을 뜻하는 옛말인 "구시"의 이두식표기로 보는 사람도 많다.

 신라 때 수도 경주를 둘러싼 다른 산들은 모두 산세가 왕도(王都)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자세인데, 유독 이 봉우리만은 나라에 반역하는 것처럼 등을 돌리고 앉았다 하여 "나라 국(國)"자와 "원수 수(讐)"의 이름을 붙여 국수봉(國讐峰)이었다. 그래서 신라 때는 척죄(戚罪)를 범한 자들을 이곳에 유배시켰다고 전한다.

 신라 눌지왕 때의 일이다. 삽량주(揷良州 지금의 양산) 태수 박제상(朴堤上)은 왜국에 건너가서 볼모로 잡혀있는 왕의 막내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도망치게 하고 자신은 잡히는 몸이 되어 결국 대마도에서 화형으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왜국으로 떠난 후 치술령 꼭대기에서 비보를 듣고 통곡하다 죽으니,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넋은 새가 되어 국수봉을 돌아 근처 바위에 날아가 숨었다. 박제상의 아내는 치술신모가 되었고 그녀의 혼조가 새가 되어 숨어든 바위가 바로 국수봉에 있는 은을암(隱乙庵)인 것이다.

 이일로 마침내 국수봉(國讐峰)은 그 치욕의 이름을 떨쳐버리고 후손들의 자랑스러운 국수봉(國秀峰)이 되었다. 배역(背逆)의 산세라 하여 홀대받다가 마치 이를 반증이라도 하려는 듯 충절과 정절의 장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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