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두동면 봉계리는 두동면의 8개 법정동리의 하나이다. 1911년 두북면에 속했던 하묵정(下墨正)의 일부와 월산(月山)의 일부를 합해 봉계동(鳳溪洞)이라 했고, 1914년에 내남면 하명곡의 일부를 포함해 봉계리(鳳溪里)라 했다.

 봉계리에는 계명(鷄鳴)·계당(桂?)·이중(梨中)·남명(南鳴) 네 행정마을이 있으며, 치술령 북서쪽 능선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다. 또 배내마을 뒤쪽에서는 삼국시대 석곽분이 발견되었고, 중리 마을 동쪽에서도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봉계리 일대에는 울산의 향토미각을 자랑하는 불고기단지가 있어 부산·대구·경주 등 인근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봉계리에는 봉계(鳳溪)와 남명(南鳴) 두 자연마을이 있다. 자연마을로서의 봉계(鳳溪)라 할 때는 시장거리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계(鷄)"가 등장하는 것은 마을의 뒷산이 닭의 모양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남명마을은 봉계장터의 동편에 있으며, 계명(鷄鳴)에 딸린 마을이다.

 이처럼 봉계리 일대에는 "계(鷄·닭)"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다. 봉계시장 남쪽에 있는 들을 닭새들(鷄沼坪)이라 하고, 활천과 봉계 사이에 있는 닭소(鷄沼)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크게 무찌른 경주의 도대장(都大將) 김호(金虎)가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봉계를 위시해 인근에는 "닭" 또는 "달"의 뜻이 붙은 지명이 많다. 월산리의 달, 월명리의 달, 달봉재의 달, 계명(溪鳴)의 닭, 닭소(鷄沼)의 닭, 닭새들의 닭 등이 그 것이다. 한편 "다리(橋)"는 그 뜻이 산(山)인 달(月)의 연장음으로 볼 수 있다. 산의 옛말 "달"은 고지명에 흔히 달(達)로 음차(音借)되어 왔으나 달(月)과도 통용되었다. 단군성조(檀君聖祖)가 도읍한 아사달(阿斯達)을 압달산(九月山)이라 한 것이 그 예이다.

 이곳 봉계에는 강씨(姜氏)와 연관되는 것들도 많다. 봉계라는 어원도 강씨(姜氏)들이 봉(鳳)자가 길운하다 하여 강태공(姜太公)이 위수(渭水)에 낚시를 드리운 옛일을 연상하며 계(溪)를 붙여 봉계동(鳳溪洞)이라 하였다 한다. 또 닭은 새(鳥)이니 새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봉황새의 봉(鳳)에 북으로 미역내가 흐르므로 "계(溪)"를 받침으로 해서 봉계(鳳溪)라 하였을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어느 때인가는 경주 부윤이 과도한 군역과 대동미 등을 부과하자 이 곳에 살던 강씨가 항의하여 결국 시정하게 했다. 그 후 경주 남쪽에도 인물이 있음을 과시하여 남명(南鳴)이라 불렀다고 한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불고불리(不告不理)의 원칙이나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도 사실 알고 보면 모두 당사자의 이의제기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가 자기중심적 이익추구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의 민원들이 시위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온건하면 돌아보지도 않기에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과격한 집단행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조직적인 항의가 수용되는 일이 이어져 온 나라에 인물이 차고 넘치는 사방명국(四方鳴國)이 되는 일은, 남명사람들 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위문화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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