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기리(芳基里) 사자평

방기리는 삼남면의 5개 법정동리의 하나다. 본래 방씨(方氏)들이 많이 살아서 방터·방대(方垈)·방기라 부르던 곳이다. 고종 때는 중남면에 속했고, 1911년에 상방기(上芳基)와 하방기(下芳基)로 나뉘었다가 1914년에 다시 합하여 방기리라 했다. 1933년에 중남면(中南面)과 삼동면(三同面)이 합해져 삼남면이 됐다.

 방기리에는 방기(芳基)·상방(上芳)·하방(下芳)·연봉(連峰) 네 행정마을이 있다. 방기리의 중방과 하방 일대에서는 청동기 및 삼국시대 고분군과 토기편이, 구터벌에서는 무문토기와 고분군 등이 발견됐다.

 방기리의 상방 북쪽에 있는 마을과 들을 가리켜 사자평(獅子坪·사지들 사자제 사지벌 못사지들)이라 하는데, 뒷산의 생긴 모양이 사자같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사자벌●은 널따란 벌을 뜻하는 이름이다. 평연(平衍)한 광원(廣原)을 ●사(沙)●라 했으며, ●자●는 산의 옛 말 ●자(自, 者)●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 ●사자(獅子)●는 불가에서 부처의 자리를 사자좌(獅子座·여기서 獅는 師로도 쓴다)라 하는데, 부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 한다든지, 석탑에 사자를 조각한다든지 하는 것은 곧 부처를 사자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사자평이란 이름도 그런 불교적 이름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신광윤(辛光胤)은 그의 아들 전(筌)과 향인 유광서 등과 함께 마을의 장정, 언양현의 군정 등 수백명의 의병을 일으켜 고을의 복마(卜馬)를 거느리는 부대는 험요한 단조성(丹鳥城)에 들어갔다. 이들 부자가 거느리는 부대는 사자들(獅子坪)에 둔병하면서 의용장 신광윤(義勇將 辛光胤)이라 크게 쓴 기를 높이 세우고 위용을 떨쳤다. 이 사자평 싸움에서 신 장군은 허수아비를 많이 만들어 병사처럼 꾸민 의병전술(疑兵戰術)을 사용했다. 그는 이른바 허허실실 전술로 연봉진(連峰進)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허수아비는 막대기와 짚 등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 헌 삿갓이나 모자 등을 씌워 만든 물건이다. 신 장군은 아마도 허수아비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 사람과 구별하기가 어렵게 해 적들의 관측기능을 무력하게 만들었거나, 어떤 신비로운 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해 허수아비가 조선군사로 보이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옛날 이스라엘이 이웃 아람군대와 싸울 때, 아람의 습격을 받은 이스라엘이 매번 미리 알고 공격을 차단했다. 이에 아람왕은 그 원인이 엘리사라는 선지자의 도움임을 밝혀내고 그를 납치하려 군대를 보내 그의 집을 에워쌌다. 위기의 순간에 엘리사는 그의 신에게 빌어 적군의 눈을 멀게 한 후, 아람군 앞에 가서 길을 잘못 들었다 말하고 그들을 이스라엘 진영 한복판으로 이끌고 갔다. 상황을 알아차린 아람군대의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자평 전투에서 왜적이 신 장군의 허수아비에 놀아나 대패한 것도, ●보기는 보아도 제대로 보지 못한●경우라 할 수 있으니, 전세가 불리한 전투에 임한 다급한 상황에서 하늘을 우러러 적군의 눈을 잠시만 멀게 해달라는 신 장군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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