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량리는 두서면 9개 법정동리 중 하나다. 본래 삼한시대 구라벌이란 성읍국가가 있었던 곳인데, 구량벌(九良伐) 또는 구량화촌(仇良火村)이라 불렀다. 이 곳은 경주군 외남면 지역으로 1906년(광무 10년) 울산군 두서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중리동과 구영동(九永洞)으로 나누어졌다가 1914년에 이들을 합해 구량리라 했고, 송정(松亭)과 중리(中里) 두 행정마을이 있다.

 구량은 "구량벌"이 줄어서 된 이름이다. 경주 남면에 속했을 때는 "구영"으로 썼는데, "구량"을 그렇게 바꾸어 썼던 것으로 추측된다. "구량벌"은 〈삼국유사〉의 박혁거세왕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량화촌(仇良火村)"이라는 촌락이 경주 남쪽 46리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벌(伐)"과 "불(火)"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니 구량화는 구량벌과 다름없다. 구량벌(仇良伐)의 구(仇)는 고(高)의 뜻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뒤에 고헌산이란 높은 산이 있는 점을 미루어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량(良)의 옛 음은 "라"이며, 이는 나라를 뜻한다. 벌(伐)은 불(火)·불(弗)·비리(卑離)·부리(夫里)·발(發)·팔(八)과도 같이 성읍(城邑)이나 도시를 뜻하는 동방의 옛 말이며, 여기에 평야의 뜻이 부가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구라벌은 "높은 나라"라는 뜻이 되어 신라인 서라벌(徐羅伐)과 같은 말이 된다.

 구량천(九良川 于川)은 구량리에 있는 내(川)이다. 소호령과 고헌산 골짜기에서 발원해 동남으로 흘러 차리의 상차리·덕산동·하차리와 구량리의 남중리를 지나 두남초등학교 앞을 흐르며, 두동면 천전리의 신당 앞에 이르러 동북으로 꺾여 북서에서 오는 서하천과 만나 삼정천으로 들어간다. 길이 7㎞로 구량리의 이름을 따서 구량천이라 한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이 되려 할 때 비분강개해 한성 판윤의 벼슬을 버린 죽은 이지대(竹隱 李之帶) 공이 이곳에 우거(寓居)했다. 본래 구량천(九良川)은 이곳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죽은공(竹隱公)이 자손들에게 지변(地變)이 일어나 강심(江心)이 바뀌어 마을 뒤로 흐르는 날에는 구량(九良)을 떠나라고 당부했다. 마침 큰 홍수로 냇물의 유로(流路)가 마을 뒤로 바뀌자 월성 이씨들은 경주로 흩어졌다고 전해온다.

 아마도 그는 전래의 풍수지리설과 주자학의 군자불기사상(君子不器思想)에 순응하려했던 것 같다.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서양인들과 달리 농업국가로서 유난히 자연의 섭리를 경외하던 민족이다. 하지만 강심이 바뀔 적에는 댐이라도 막으라는 적극적 조치를 권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지도록 유지(遺志)를 내린 것은 과연 소극적인 대응이라고만 보아야 할까.

 지난해 홍수 때 강심이 여럿 바뀐 강원도 일대 수재민들이 올해 또 다시 물난리가 닥칠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집 앞의 강이 어느 날 불현듯 유로가 바뀌어 집 뒤로 흐른다 해도 선뜻 떠나지 못하고 그 곳을 붙들고 살아가야만 하는 수재민들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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