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도량인 운문사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 호거산(운문산)자락에 있다.  경북이라 하면 꽤 먼 곳이라는 거리감으로 다가오지만 울주군 언양에서 운문재를 넘어가면 차로 1시간반정도면 닿는 울산에서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운문사는 여승의도량답게 절집에 드는 길목부터 흐트러짐 없는 단아함을 풍겨낸다.  옛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찰답게 대가람의 위용을 갖추고 입구로 이어지는 1㎞남짓 솔숲은 자태가 고운 홍송으로 이뤄져 있다. 소나무숲 사이로는 맑고 찬 개울물이 세속의 번뇌를 씻어내듯 조용히 흐르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면 빗질의 칼칼한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 마당에는 조그마한 잡풀 하나 없다.  운문사에는 신라때의 삼층석탑과 석등, 고려 원응국사비, 조선시대 세워진 비로전 등 보물만 7점에 달하고 만세루 앞에는 4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천연기념물 "처진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노송이지만 상한 곳 하나 없을만큼 정정하게 번뇌에 찌든 대중들을 넉넉한 품새로 맞는다.  한 절집에 몰려 있는 7점의 보물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당앞 석등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둥근 뚜껑이 있고 고리가 붙은 항아리, 전설로 신라 진평왕때 만들어졌다는 석조 석가여래좌상과 사천왕 석주, 대웅전보전과 그 앞에 세워진 3층석탑 그리고 운문사의 중창역사를 기록한 원응국사비 등이다.  운문사는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한 신승에 의해 세워진 다섯개의 절 가운데 하나로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내린 원광국사가 608년에 중창했다. 그 다음 고려시대에이르러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이 2차중창을 하고 지금의 운문사인 가슬갑사를 포함한 오갑사를 다시 역사속에 부상시켰다.  고려통일뒤 태조 왕건이 943년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밭 500결을 하사했다. 왕건으로서는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보양의 은혜에 보답할뿐 아니라 지방을 다스리는 거점으로 치국의 목적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500결이라는 수치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청도군의 간선이 모두 3천932결에 비쳐볼때 이의 1/8에 해당하므로 당시 운문사의 사세를 상상해볼만 하다.  다시 고려 숙종 10년 1105년 원응국사가 3차중창을 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절집 일부가 불에 타 사라졌다. 그뒤 여러차례 중창과 보수를 거친뒤 지난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이 절에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고 87년에는 승가대학으로 개칭돼 여승들의 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흔히들 200여명이 넘는 여승들의 염불합창으로 운문사의 장엄한 아침예불을 운문사의 대표적인 아름다움으로 꼽는 이가 많은데 아침예불에 못지 않게 불전사물도이 절집의 대단한 매력이다.  매일 오후 6시15분 범종울에서 치는 법고소리와 목어, 운판, 범종을 치는 소리는 산자락 골깊은 계곡에까지 퍼져나갈 정도로 엄숙하다. 늬엇늬엇 넘어가는 해가 산자락에 걸려 있을 무렵 장삼과 가사를 차려입은 여성들이 마당에 서서 예를 차리는모습은 여느 절집의 사물에서는 볼 수 없는 운문사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운문사에서 저녁예불전의 사물까지 보고 난뒤 운문재를 넘으면 사방은 어둑어둑해져 온다. 운문재를 절반정도 넘어오면 산림청에서 최근 조성한 운문산자연휴양림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가을색이 수줍은듯 잎끝에서 들듯말듯한 삼림이 주는 평온함에 감싸이고 싶다면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 묵고가도 좋을듯 하다.  울창한 숲과 계곡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넉넉함이 도시생활에 성말라져 있던 마음을푸근하게 해준다. 또 군데 군데 설치해둔 야생식물관찰원, 숲탐방로, 목교 등은 가벼운 산책길의 눈요기를 제공해준다. 이번 여름 바쁜 일과로 휴가를 놓쳤다면 자연속에서 늦깍이 휴가를 즐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휴양림내에는 콘도형태의 숙박시설과 텐트를 칠 수 있는 야영지를 빌려준다. 숙박시설은 콘도형태로 취사도구가 모두 갖춰져 있으나 아쉬운 점은 사용예정일 전달에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는 것. 그러나 6~8월까지의 여름 성수기를 지난 비수기 평일에는 비어 있는 방이 많으므로 예약없이도 사용할 수 있다.   ◇길라잡이=울산시내에서 고속도로나 국도를 이용해 언양까지 간다. 언양 석남사로 가기 직전 청도로 가는 표지판이 오른쪽에 있다. 이정표를 따라 청도를 향해 가면 구불구불 급경사의 운문재를 넘어가게 된다. 운문재를 다 넘어가 청도에 닿으면 운문댐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이 먼저 눈에 띄고 이어 조금 더 가면 운문사 표지판이 나온다. 운문산자연휴양림(054·371·1323)은 운문사보다 언양쪽으로 더 가깝다. 언양에서 운문재를 접어들어 10분이 채 안되는 거리를 가면 휴양림 입간판과마주친다.   ◇아는만큼 보인다-사천왕 불가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에 우뚝솟아 있다는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을 말한다. 사대천왕, 사왕, 호세사왕이라고도 한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을 각각 동서남북에 배치한 것이다.  사천왕은 인도신화에 나오는 세상을 지키는 호세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일찍부터 불교에 받아들여져 원시경전인 "장 아함경"에 등장하고 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형상화된 사천왕상은 간다라 출토의 부조나 불전도 등에 나타나는 것처럼 고대 인도의 귀인모습을 하고 있으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인형의 사천왕으로 변해 갔다. 이는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모습이다.  사천왕은 나라와 경전에 따라 손모양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니고 있는 물건도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칼과 창, 탑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다문천은 손에 항상 보탑을 들고 있어 사천왕의 명칭을 확인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된다.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계통의 사천왕은 지국천이 비파, 증장천이 검,광목천이 새끼줄, 다문천이 보서(족제비) 또는 보탑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삼국유사 권 4에 신라 선덕여왕 때 양지라는 장수가 영묘사에 사천왕상을 조성했다고 하는 기록에 따라 7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경주의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전(679년)을 비롯해 감은사지 삼층석탑 출토 사리기에 부착된 사천왕상(682년)과 석굴암 사천왕상(750년경)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애정기자 love@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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