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박상진 호수공원

▲ 호수공원의 긴 데크길 끝에 만나는 박상진광장과 스토리벽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인생을 불살라버렸던 박상진 의사의 인생궤적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친환경 휴식공간으로 꾸며진 공원
긴 나무데크길 끝에
박상진 광장과 스토리벽화 자리
고헌의 인생궤적 보여주는듯
오직 내나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판사 명예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인생 불살랐던
올곧은 기개와 굳은 신념 되새겨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춰져왔던
그의 숭고한 신념이
아름다운 호수공원에
한떨기 꽃으로 피어나기를

탕! 탕!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공이쇠가 때리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벼락같은 총성으로 이어졌다. 불을 뿜는 총구를 통해 빠져나온 탄알이 민족의 반역자 몸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이내 희뿌연 화약연기가 피어오르며 친일 갑부이자 악독지주가 민족과 조국의 이름 앞에 꺼꾸러졌다. 쓰러진 사람은 민족 반역자 장승원이었고, 총으로 그를 처단한 사람은 대한광복회 행동대원들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벽면에 고시문 한 장이 붙었고, 그 고시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오직 나라를 찾고자 함은
하늘과 인간의 뜻이 다 같거늘
너는 어찌 나라와 백성을 팔아
네 잇속만 챙기려 하는가!
이제 너의 큰 죄를 꾸짖고 경고하노라.
-꾸짖고 경고하는 자, 광복회-

일제강점기, 독립단체에 대한 무자비한 폭압이 자행되던 무단통치시기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고,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직 조국의 독립에 대한 불타는 일념만이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였고, 반드시 빼앗긴 국권을 되찾겠다는 뜨거운 충정만이 그들의 강건함을 더하였기에, 그들은 두려움 없이 그 일을 행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있었다.

백두대간 가운데 태백산, 그 태백산 산줄기 따라 낙동정맥이 이어지고 그 낙동정맥 끝자락에 위치한 울산의 진산(鎭山)무룡산, 그 무룡산 아래 송정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고, 1884년 그 마을에는 자(字)는 기백(璣白)이요, 호(號)는 고헌(固軒)이라 쓰는 위대한 독립투사 박상진이 태어난다. 전통적인 유교 가문에서 태어난 박상진 의사는 13도 창의군을 지휘했던 왕산 허위선생으로부터 한학과 나라 사랑하는 정신을 배워 일신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선생은 1907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힌 후,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했으나 그해 경술국치로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나라가 망한 마당에 식민지의 관리가 되어서 무엇 하겠냐’ 며 판사직을 헌신짝 버리듯 내어던져 버리고 오직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의기만으로 독립투쟁의 방법과 전략을 모색하던 중, 1913년 조선국권회복단에 참가한다. 하지만 일제의 무단통치에 맞서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1915년 채기종 선생 등과 함께 힘을 합쳐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그 총사령이 된다. 그 후 선생은 불꽃같은 생(生)을 사시다가 대구 권총 사건으로 옥고를 겪은 뒤, 1917년 11월 조직이 발각되어 다시 체포된다. 그리고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던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30분 대구형무소 사형집행장에서 굵은 동아줄에 목이 묶인 채 교수형에 처해진다. 일제의 극악무도한 교수형에 의해 숨을 거두기 직전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오직 절명시(絶命詩) 한 수와 만세 삼창뿐이었다고 한다.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으로도 두 팔을 들어 올려 ‘대한독립만세’라고 세 번 크게 외친 뒤 위대한 독립투사 박상진은 그렇게 스러져갔던 것이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으며, 그를 살리려는 각고의 눈물겨운 노력도 있었지만, 그는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향년 38세.

 

그리고 96년의 시간이 흐른 2017년 8월, 북구 송정동에 위치한 ‘박상진호수공원’을 찾았다. 햇살마저 숲속 사이 호수 위에 내려앉아 무더위를 식히고 있는 뜨거운 여름날이다. 왼편 호수 위로 놓인 데크길 산책로가 무척이나 정갈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늘져있어 주저 없이 발길을 내딛었다. 호수위로 불어오는 바람으로 더운 몸을 식히고, 잎잎이 푸른 나무 그늘을 햇볕 가림막 삼아 호수 길을 걸었다. 주민들에게 친환경적인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이전부터 있던 저수지를 새롭게 호수공원으로 조성하여 다양한 쉼터와 약수터 그리고 피크닉장과 물 놀이터와 함께 공연장과 카페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다. 물 가운데로 이어질 듯 서있는 팔각정을 지나니 끝이 없을 것 같았던 호수 위 긴 데크길이 끝나고 비로소 흙길이 나타났다. 곧이어 ‘박상진광장’과 함께 스토리벽화가 박상진 의사의 인생궤적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박상진, 그도 독립투사이기 전에 보고픔의 감정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에,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은 마음인들 없었으랴! 그도 대한광복회 총사령이기 전에 그리움의 감정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에 그가 나고 자란 이곳 송정마을 물가를 그리워하는 하는 마음인들 어디 없었으랴! 하지만 그는 일제의 압제에 온 몸으로 항거하던 의로운 임무를 끝내고 풀잎의 이슬처럼 사그라져갔던 것이다.

▲ 홍중표 자유기고가 (전)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빈약한 상상력에 아쉬움을 느끼다가 불현듯 처연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개발의 흙먼지가 일으키는 희뿌연 먼지 속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박상진 의사 생가가 떠올랐던 것이다. 오직 내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개인적인 인생의 퇴로마저 스스로 없애버리고, 오직 나라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인생을 불살라버렸던 그분의 올곧은 기개와 굳은 신념이 함께 떠올랐던 것이다. 그와 함께 공원 앞에 이름 석 자 붙이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크게 없는 이 눈부신 현실 앞에서 가슴이 잠시 먹먹해지던 그때 호숫가 그늘진 길섶에 하늘거리는 한 떨기 이름 모를 들꽃이 보였다. 가던 발길을 꽃 앞에서 멈추고 잠시 경건함을 가다듬었다. 오래도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춰져왔던 그분의 고매한 정신이, 그분의 숭고한 신념이 산에 언덕에 그리고 이 맑은 호수공원 숲속에, 부디 한 떨기 꽃으로 부활하셨기를 소망하며 시를 한 편 읊은 후, 한창이나 따갑던 여름햇살이 설핏해질 무렵 송정 ‘박상진호수공원’ 을 내려왔다.

산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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