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18. 천전리 각석(상)

▲ 천전리 각석 앞에 서면 마치 거대한 병풍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병풍 같은 바위에 선사인들은 맨처음 태양이나 마름모꼴의 주술같은 그림을 그렸고 그 후대들이 다양한 동물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서석곡에 놀러 온 신라의 왕족과 화랑, 승려 등은 수려한 경치를 감상한 뒤 연애편지 같은 글자를 새기고 만화같은 그림도 그렸을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양·그림·문자 새겨져있어
셰일 재질이라 글자·그림 조각 쉽고
15도 가량 기울어져 있어 비 안맞아
1970년 동국대 조사단이 처음 발견
신라 때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
관직명 등 언급돼 귀중한 연구자료

◇글자가 새겨진 바위, 천전리 각석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이 있는 곳은 원래 서석곡(書石谷)으로 불리웠다. 신라 왕족이 이 곳에 놀러왔다가 근처 큰 바위벽에 글을 새겨놓은 바람에 이름이 이렇게 붙여졌다. 서석(書石)이란 문자 그대로 ‘글을 쓴 돌’이라는 뜻이다. 학계에서는 다른 주장을 한다. 신라시대 이전에 선사인들이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고, 글로 새겨진 금석문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천전리 암각화’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울산시는 현지인들에게 ‘각석(刻石)’이라는 명칭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천전리 각석은 길이 9.5m, 높이 2.7m의 암각화다. 각석 앞에 서면 거대한 병풍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이 각석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양과 그림, 문자가 새겨져 있다.

1970년 12월, 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는 이 천전리 각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반듯한 벽면에 온갖 그림과 형상들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사단은 이듬해 3월부터 천전리 각석 현장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마다 반구대 1㎞쯤 아래 개울가에 호랑이 그림이 있다며 조사해 달라고 했다. 조사단은 그해 12월25일 다시 대곡천변을 찾았으며 거기서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하게 됐다.

▲ 천전리 각석 건너편에는 널따란 반석이 있는데, 그 반석에 공룡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이 공룡발자국 위에서 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선사인과 신라사람들이 만든 미술교과서

암각화는 크게 두 가지 기법으로 표현됐다. 하나는 표현 대상의 내부를 모두 쪼아낸 ‘면쪼기’ 기법이고, 다른 하나는 윤곽만을 쪼아낸 ‘선쪼기’ 기법이다. 천전리 각석의 상부에는 면쪼기로 새겨진 사슴 등 여러 종류의 동물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선쪼기로 나타낸 다양한 기하무늬가 나타나 있다. 하부에는 여러 명문(銘文 : 바위에 새겨넣은 글자)과 ‘가는선긋기’를 이용한 인물 및 동물상 등이 그려져 있다.

상부의 마름모꼴무늬, 굽은무늬, 둥근무늬, 우렁무늬, 사슴, 물고기, 새, 뱀, 사람얼굴상 등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그림들은 당시의 풍요의식과 관련된 표현으로 해석된다. 하부의 기마행렬, 배의 항해 모습, 용·말·사슴 그림, 300여 자의 명문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신라사람들이 삼국시대 이래 이곳을 성지(聖地)로 여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 : 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도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이다.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천전리 각석 탁본.

◇인간의 삶과 글자, 그리고 스토리

서석곡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언양읍과 양산시를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또 낙동강을 통해 남해 바다와 경상도 각지로 이어지고 낙동강 상류를 통해 한강 유역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대곡천은 신라시대 때 중요한 교통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이 대로(大路)에서 살짝 비켜선 서늘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서 한여름 피서를 즐기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바위는 화강암 바위와 달리 셰일(shale) 재질이어서, 단단하지 않아 글자나 동물그림을 조각하기 쉽다. 여기다 바위면은 평평하면서도 15도 가량 기울어져 있어서 비를 맞지 않으며 윗부분에도 손이 쉽게 닿는다.

선사시대는 기록으로 역사가 남겨지기 전의 시대를 말한다. 대체로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를 말한다. 선사시대 울산의 기후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구석기 시대의 울산은 빙기의 마지막에 해당해 많이 추웠다.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어 간빙기가 시작되면서 울산의 날씨는 점차 따뜻해졌다. 따뜻한 날씨를 따라 해수면이 높아지고 다운동 등 태화강 중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울산만이 형성되었다.

천전리 각석 인근도 많은 인구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암각화를 통해 동물들의 생리나 번식방법 등을 배워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태양과 신적 존재에 대한 신앙심도 갖게 됐을 것이다. 글·사진=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