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그건 패륜이고 불륜이지. 세간의 남자가 강하게 몰아붙인다. 신라의 제51대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의 이야기다. 결혼을 할 수 없는 여왕에게 위홍은 남편 역할을 했다. 위홍이 죽자 여왕은 임을 위한 극락왕생을 비는 원당암을 조성하였다. 사기에는 둘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전하는데, 뭇사람의 입방아에 올라 망국의 원흉이 되었다. 한 여자의 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원당암을 품은 비봉산이 가을 단풍으로 활활 타오른다. 그 빛이 엷게 내려앉은 보광전 마당은 진성여왕 때 만들어진 석조 유물들의 전시장이다. 법당의 전면을 장식하는 축대는 안상문과 연화문을 새겨 아미타불에 대한 존엄을 한껏 나타낸다. 나란히 선 다층석탑과 석등은 보물 제518호로 높지 않아 바라보기에 그만이다. 다층석탑은 푸른빛을 띠는 점판암이 주재료다.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청석탑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하대석은 화강암으로 3층을 쌓고 그 위에 점판암의 단층기단을 올렸다. 기단의 받침돌은 복련이 화려하다. 탑신부의 몸돌은 사라지고 10매의 지붕돌만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처음부터 몸돌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긴 어리석은 중생이 보이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볼 수 있으랴.

 

석등은 시원하게 솟은 간주석이 눈길을 끈다. 이 기둥을 받치는 육각의 점판암 하대석과 상대 받침돌에도 연꽃무늬가 또렷하다. 몸돌이 없는 석탑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이 결실된 석등은 알맞춤하게 짝을 이룬다. 보광전을 향한 배례석 위에는 두툼하게 조각된 커다란 연꽃 한 송이가 피었는데, 그 안에 둥근 연자방까지 있어 기품을 더해 준다. 여왕은 연꽃들을 활짝 피워 올려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은 아닐까.

희귀한 청석탑을 뒤로하고 전망대인 운봉교에 오른다. 해인사의 법당과 장경각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야산의 최고봉인 상왕봉이 잡힐 듯 가깝다. ‘공부하다 죽어라.’ 가야산의 대쪽, 혜암스님의 말씀이 돌기둥으로 남아 내 등에 꽂힌다. 늦가을, 가야산을 공부하느라 오래 운봉교에 앉아 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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