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립미술관 올 12월 개관 앞두고
울산미술 시대별·양식별 정립에 나서
‘뿌리찾기’ 지역예술 전체로 확대되길

▲ 홍영진 문화부장

울산무용의 맥을 짚을 때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척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암 투병으로 여든이 되던 2009년 작고했다. 사실 그 어른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동강병원 입원실에서 생전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지역예술가들과 문병을 간 자리에서 이런 당부를 했다. “홍기자, 내 방에 한번 가 봐. 거기 가면 볼 수 있어. 울산춤이 그 안에 다 있다. 누구라도 한 번쯤 살펴 봐주면 좋겠는데….” 몸이 불편한 선생을 병원에 두고, 사모님과 동행하여 ‘이척 춤 전통 연구원’을 찾아갔다. 선생은 사무실 한귀퉁이 두어평 쪽방에서 수년 간 지냈다. 처음엔 방이 아니라 창고인 줄 알았다. 겨우 몸을 누일 이부자리 하나가 깔려있었다. 상자 더미는 한평생 그가 입었던 무용복이다. 작품별로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소품도구, 분장용 화장품상자, 1966년 울산에서의 첫 이척무용발표회를 비롯한 팸플릿과 포스터 뭉치도 많았다. 춤공연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도 100여개 가까이 됐던 것 같다. 액자 모서리에 직접 쓴 한줄 메모지가 끼어있었다. 문구가 아직도 선명하다. ‘나무는 쉬고 싶으나 바람이 가만두지 않는다’ 자신의 춤 인생이 꼭 그러했음을, 울산 춤문화가 이러했음을 누구라도 알아봐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마주한 그의 춤 인생을 몇 편의 기획물로 다뤘다. 이후로 간간이 그를 기리는 무대가 이어진다. 지난해 연말에도 제자들의 ‘이척 춤 맥(脈)을 잇다’ 공연이 선보였다. 하지만 그 뿐. ‘이척의 춤’이 지닌 ‘반세기 울산춤문화’의 가치는 여전히 정립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간다.

근대울산예술을 돌아보면 무용가 이척 선생 이전에 연극인이자 문학인인 김태근 선생도 있다. 그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적은 이척 선생이 먼저 병석에 들자 마음이 심란했던 것 같다. 이척 선생 제자들이 스승의 쾌유를 바라며 헌정공연을 마련하자 노구에도 불구하고 직접 찾아 와 휠체어에 의지한 이척 선생을 위로했다.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던 그날 저녁, 공연이 끝나고 어찌하다보니 김태근 선생을 집까지 모시는 일이 내 몫으로 떨어졌다. 고맙다는 인사 끝에 뒷좌석 문을 열고 내리던 선생이 나직이 이런 말을 했다. “다음이 내 차례인 듯 싶네.” 김태근 선생은 2011년 아흔둘의 나이로 영면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울산연극인 중에는 장생포가 고향인 김삼일 연출가도 있다. 올해 일흔아홉인 그는 2021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서 희곡부문 본심을 맡으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근대 울산연극사에는 익히 알려진 천재동, 김태근 선생의 작품 외에도 배우 아닌 주민들의 활동이 꽤 많았다. 시기와 장소는 한국전쟁 전후로 수년간 추석명절, 장생포 부두 창고극장에서다. 장생포 청년들이 신파극을 올렸는데, 마을어르신과 아이들이 거적때기를 들고 구경왔다. 피난민과 양공주도 찾아와 피난살이 설움을 달랬다고 한다. 장생포 옆 용연동 뻔덕마을(송계부락)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울산연극일화가 있다. 장정국 전 울산남구문화원 부원장은 어릴 적 고향마을 설 명절을 추억하면서 연극과 노래자랑이 수년간 이어졌다고 했다. 역시나 마을 청년들이 주축이었다. 당시 초중학생도 연극무대에 올랐다. 마을에서 제일 큰집(대문집) 마당의 가설무대였다.

울산시립미술관추진단이 오늘날의 울산미술이 있기까지, 그 과정을 거꾸로 더듬는 작업(울산미술기초자료 조사 및 연구용역)을 추진한다. 시대별·양식별로 정립하는 최초의 작업이다. 시립미술관 개관(2021년 12월)전에 일부 결과물이 나온다니 기대가 크다. 다만 ‘미술’에만 국한되니 아쉬움도 크다. 앞서 밝힌 춤과 연극, 음악, 문학, 국악, 연예, 사진과 미디어, 건축에서도 같은 시도가 필요하다. 물질과 정신의 산물인 도시문화는 우리 삶과 하나된 예술의 뿌리를 찾는데서 정립될 수 있다.

홍영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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