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성추행·성폭력 사건 잇따라
권력 착시에 의한 파행적 사고가 원인
안전매뉴얼은 동의·존중임 기억해야

▲ 김두수 서울본부장(부국장)

2017년 서울시내 한 예식장. 하객들이 가득하고 신랑신부 혼인선서에 이어 주례사가 시작됐다. 이윽고 어렴풋 낮익은 얼굴이 뒤늦게 나타났다. 한때 정국을 휘어잡다시피한 3부요인 중의 한사람. 이른바 골프장 ‘캐디’ 성추행 사건의 주인공. 윤기없는 일그러진 비주얼 그 자체였다. 식장의 언론인들은 이상야릇한 눈빛만 주고받았을 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예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달아나듯 밖으로 빠져 나갔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얼마나 시달렸을까. 미루어 짐작컨대 ‘정치적 사형선고’나 진배 없는 피곤한 삶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정의당 김종철 대표의 여성 국회의원 성추행 사건이 일파만파다. 헌정사상 유례없는 공당의 대표가, 그것도 소속당의 현직 국회의원을 성추행하다니 세기적 뉴스다. 국회의원은 물론 전국 당원들의 명예를 깡그리 추락시킨 파렴치한 행태 앞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안희정’에 이어 ‘오거돈’ ‘박원순’ 등등. 이들의 공통분모는 사회적 명성과 존경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결정적 패착인 ‘성’관련 사건의 중심부였다. 미투 이후 세상에 까발려진 성추행과 성폭력 의혹사건은 어디 이뿐이겠는가. 최고의 품격을 표방하며 나름의 성공한 그들의 이면엔 과연 무엇이 숨어 있었길래 그랬을까?

2015년부터 성폭력 예방 오피니언 강사로 재능기부 저널리스트에 이어 한국기자협회 양성평등특별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면서 학습하고 연구한 결과, 음양의 다양한 성폭력 사건 가운데 정치권과 유명인사들의 사례는 시쳇말로 권력의, 권력에 의한 성추행과 성폭력의 전조가 깔려있다는 것. 즉, 권력 착시현상에 의한 파행적 여성친화적 사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피해자는 면전에서 단칼에 뿌리치지 못한다. 손사레를 쳐도 멈추지 않고 외려 “속내는 좋아하면서…교태를 부린다”라고 무시당한다. 권력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홀로 즐기는 행태를 반복한다. 피해자는 목숨과도 같은 직장이 걸려 있고, 거부하면 또 다른 빌미로 퇴출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몸부림친다. 그럼에도 위선적 권력자들은 알고도 모른척 파행적 행태를 반복하다 끝내 대형 참사로 종착역을 맞는다.

문제의 심각성은 인내심의 한계에 직면한 피해자의 절규가 외부로 촉발될 땐 권력자들의 공통점은 힘에 의한 정치적 해법이다. 여의하지 않을땐 이른바 ‘꽃뱀 마케팅’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강력한 지지층을 이용해 무차별 ‘피해자 다움’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폭력 성추행 가해의 98%가 왜 남성일까? 우리 사회 고질적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비하와 함께 직장에 이르기까지 성차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국내외 논문에서도 확인된다. 때문에 성차별의 근본원인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해 유년기부터 남성문화가 자리잡게 되고, 나아가 성인지 감수성 조차 무력화 된다.

그렇다면 성추행과 성폭력의 안전매뉴얼은 무엇일까? 핵심은 ‘동의’와 ‘존중’이다. 예컨대, 직장의 연장선 또는 절친사이라도 가벼운 스킨십과 손을 잡고 싶을땐 직접 허락(동의)을 받아라. 어색 하다고? 아니다. ‘YES’와 ‘NO’를 분명히 해야 하는 동시에 여성의 침묵은 ‘동의’가 아닌 ‘NO’라는 것이다.

특히 이성과 동성 관계없이 성과 관련된 야한 농담부터 삼가는 자세가 급선무다. 음주가무에 여성을 선택적 콘셉트화하는 남성들의 행태 역시 ‘저급함’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직장의 상하, 절친, 애인, 심지어 부부일지라도 ‘거부 시그널’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게 동시대 삶을 하는 최소한의 품격이다. “누군가 검색창에서 이름을 검색한 결과, 가족 중에 성추행과 성폭력 의혹 연관어만 나와도 취업은 차치하고 연애와 결혼은커녕, 연장선에서 어른들의 사돈관계조차 파탄나게 된다. 건전한 사회생활은 사실상 끝장” 한 저명인사의 대인 관계 기피와도 같은 ‘일그러진 비주얼’이 지금도 뇌리를 스친다.

김두수 서울본부장(부국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