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은 정몽주의 언양 유배(상)

▲ 언양현고지도(1832). ‘요도’가 표기되어 있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 말기 우왕 1년(1375) 6월 언양에 유배와서 이듬해(1376) 3월 사면되어 개경으로 돌아갔다. 햇수로는 2년이지만 실제로는 9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중국의 원명(元明) 교체기에 신흥 강국 명에 귀부하고 쇠망기의 원을 배척한 데 대한 친원파의 탄핵 때문이었다.

포은은 우왕 1년 6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중국에는 주원장이 남경에서 명을 건국하고 북상하여 원의 수도인 대도(지금의 북경)를 점령했다. 이에 원은 몽골고원으로 패퇴했으니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당시 고려는 친원파가 반원정책을 편 공민왕을 시해하고 명의 사신을 살해하는 등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고,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친명파가 반원정책을 표방하면서 대립하고 있었다. 이 때 북원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니 친원파 실권자 이인임과 지윤이 이를 맞이하려 했고, 포은은 박상충, 김구용 등 신진사대부 십 수명과 함께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고려말 1375년 친원파 탄핵으로
포은, 언양서 9개월동안 유배생활
그간 유배지 ‘요도(蓼島)’로 구전
섬 뜻하는 ‘島’가 불러온 오해일뿐
근거될 만한 사료 찾을 수 없어

정도전·권근의 사례에서 보건대
유배생활 기거·운신에 제한 없어
포은도 현청 인근 민가생활 추정
당시 언양 현청은 상북면 천전리
객사명문 찍힌 기와 출토 뒷받침

◇어음리 요도가 유배지인가?

포은은 앞에서 본대로 이듬해 3월에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언양의 구전에 따르면 포은의 유배지는 요도(蓼島)라 한다. 요도는 1832년 <언양현읍지>에 처음으로 실렸다. ‘요도는 현 동쪽 1리 어음리 보통원 아래에 있다. 기슭 밭 가운데 있는 작은 언덕인데, 두 물줄기 사이에 있어 요도라 한다’고 했다. 여기의 두 물줄기는 가지산에서 발원한 남천(南川)과 고헌산에서 발원한 감천(坎川)이다. 감천은 남천과 대비해서 북천(北川)이라는 뜻이다. 요도에는 ‘섬島’자가 들어가지만 섬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2002년에 발간된 <언양읍지>에는 찬자 불명의 <헌양잡기>(1915)를 인용하여 위 <언양현읍지>의 기록에 이렇게 덧붙여 놓았다. ‘(요도의) 유배 죄인 12명에게는 한 달에 쌀 3두씩을 지급하다가 훗날 6두씩 지급하기로 규식을 정하여 민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위의 구전과 더불어 정몽주 요도 유배의 논거가 되었다. 필자는 최근 <헌양잡기>에 이 기록이 없음을 확인했다.

창원대학교 민긍기 명예교수의 <울산의 지명>(2020)에 요도에 대한 설명이 있다. 요도의 ‘蓼’의 뜻은 ‘여뀌’인데, 이것을 빌려 드나드는 길목의 첫머리를 뜻하는 ‘어귀’를 표기한다. ‘島’는 소리를 빌려 ‘야(野)’를 뜻하는 ‘들’의 변이형태 ‘도(道)’를 표기한다. 그러므로 요도는 ‘어귀들’의 한자를 빌린 표기이고, ‘드나드는 길목에 있는 첫머리에 있는 들’을 뜻한다.(민긍기, 2020, <울산의 지명> 350~351쪽) 요도는 섬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요도는 남천과 북천이 만나는 지점 첫머리에 있는 들판이다.

언양읍 어음리에 있는 ‘요도사’는 이 곳에 유배 온 포은을 모신 사당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사당 안에는 ‘어음리사요도지신위(於音里社蓼島之神位)’라는 비석이 있다. ‘社’는 토지신을 말하는데, 그러므로 요도사는 어음리의 토지신을 모신 사당일 뿐이다. 요도가 포은의 유배지라 구전되어 온 것은 ‘섬島’자에 이끌려 흔히 중죄인을 유배하는 제주도, 거제도 등으로 비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도는 포은의 유배지가 아니었다.

▲ 언양읍 어음리에 있는 요도사 내 비석. ‘어음리사요도지신위(於音里社蓼島之神位)’라 새겨져 있다.

◇정도전과 권근의 유배생활

언양 고지도를 보면 요도는 고려말에는 사람이 살지않는 무인지경이었다. 이런 곳에는 죄인을 유배하지 않는다. 죄인으로서는 장기간 생존할 방법이 없고, 감시자가 없어 쉽게 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은의 유배지는 어디인가? 포은과 같은 시기의 신흥사대부 정도전과 권근의 유배를 통해 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원훈이며, 권근은 <입학도설>을 남긴 유학자이다.

정도전도 우왕 1년에 북원 사신 영접을 반대하다가 전라도 회진현에 유배되었다. 그는 황연이란 자의 집에 세들어 기거하고, 동리 농민들과 술을 마시면서 어울렸다. 농민들은 날마다 찾아와 함께 놀고, 철마다 토산물을 얻으면 술을 가지고 와서 즐기고 돌아갔다. 그는 두 세 학자들과 강론하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를 읊기도 했다. 땅을 골라 노복과 함께 두 칸 초가를 짓는데, 동리 사람들이 도와주어 며칠만에 완성했다. 이처럼 정도전의 유배에는 기거와 운신에 제한이 없었다.

권근은 창왕 1년(1389)에 왕을 속이고 업신여겼다고 탄핵당해 황해도 우봉에 유배되었다. 그 후 영해·흥해·김해·익주 등지로 적소(謫所)를 옮기면서 약 1년간 유배생활 했다. 영해에서는 전직관리가 날마다 찾아와 강설을 들었고, 흥해에서는 한 유생이 조석으로 떠나지 않고 공부했다. 김해와 익주에서는 사찰에서 기거했다. 여러 유배지에서 병마사와 관찰사를 비롯한 전·현직관료, 재지사족, 승려와 교유했는데, 기문을 부탁하거나 음식물, 술과 기생을 보내주는 자도 있었다. 심지어 현지 수령이 술을 보내주기도 했다. 역시 기거와 운신에 제한이 없는 유배생활이었다.

◇언양현 치소 인근의 어느 민가

위 두 가지 사례로 보아 포은의 유배생활도 기거와 운신에 제약이 없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적소도 운신을 크게 구속하지 않는 동리의 한 민가였을 것이다. 이 민가는 수령이 집무하는 현청 인근에 있어야 한다. 수령에게는 죄인의 도망을 감시하고, 병을 구완해서 형기를 무사히 마치게 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령은 중앙의 고관이 임지에 유배오면 우대하기 마련이었다. 죄인이 언제라도 해배되어 복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은 당시의 언양 현청은 어디에 있었을까?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언양읍성은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토성으로 쌓았는데, 길이 1427척이라 했다. 그런데 조선 문종 원년(1451)의 기록에 ‘언양현 읍성은… 읍성 옛터 1427척에다 1000척을 더해 쌓기로 했다’고 하였다. 양자의 길이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언양읍성은 고려 말에 처음 쌓은 토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록은 포은 유배 당시의 언양읍성은 조선시대의 그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언양읍지>(1919) 고적조에 ‘오늘날 거지화촌은 옛 거지화현 터(基)라고 전해온다” 했다. 이처럼 거지화촌에는 신라 거지화현의 치소가 있었다. 오늘날 상북면 길천리에 속한 지화마을이다. 2010년 울주 길천일반산업단지 진입로를 개설하기 위해 한국문물연구원에서 상북면 천전리를 발굴조사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客舍’(객사)라는 명문이 찍힌 고려시대 기와이다.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비치하고 배례하는 건물인데, 수령 집무소는 그 동쪽에 두게 되어있다. 동헌이란 이름이 그래서 생겨났다. 이 사실은 신라~고려말 언양현 치소가 바로 천전리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로써 포은의 적소 역시 천전리 인근의 어느 민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천전리는 지화마을과 1㎞ 정도 거리에 있다. 포은의 적소는 어디였을까?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14~2015년 본보에 연재됐던 ‘울산史(사) 에세이’는 문헌에 기반한 전문적 고찰로 지역사 연구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송수환 박사가 새로운 주제와 해석으로 6년 만에 다시 글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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