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은 정몽주의 언양 유배(하)

불교식 상례 지내던 여말
포은 등 선진적 성리학자
주자가 쓴 ‘가례’에 따라
부모 3년상 치르고 가묘

신계은, 정종문, 정상인
고려말 언양 효자 3인방
유교식 3년상 치러 눈길
포은의 영향 추측 가능

포은과 가까웠던 길재
고향 선산서 교육 전념
언양지역 유학 선구자
정상인도 그의 문하생
이들의 연결고리인 포은
향산리 정상인의 집에서
유배생활한 것으로 추정

▲ <신증동국여지승람> 언양현 효자, 열녀조. 고려시대 인물인 신계은, 정종문, 정상인이 차례로 등장한다.

포은의 적소가 언양현 치소 상북면 길천리 어느 동리의 민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방증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 언양현, 효자조에는 고려시대의 인물 셋이 등장한다. 차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계은. 부모를 위해 전후 6년을 여막에서 거처했다.

다음 정종문. 부모가 잇따라 돌아가시자 몸을 상할만큼 슬퍼하여 예절이 과도했고, 여막에서 3년을 거처했다.

마지막 정상인.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는데, 조부모가 돌아가시자 여막에서 3년을 거처했고, 장례와 제례를 모두 가례에 따랐다. 또 스승 길재(吉再)를 위해 심상(心喪) 3년을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경복했다.

한편 열녀조가 있어 정씨가 실렸는데, 남편이 죽자 3년을 여묘하여 태종조에 정려했다 한다.

▲ <헌양잡기>(1915) 하북면 향산조. ‘처사 정상인 고거’라 되어있다.

◇고려말 언양의 효자와 열녀

여막에서 거처한다는 것은 묘소를 지킨다는 뜻이다. 심상은 상복은 입지 않으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는 일을 말한다. 3년상은 <논어>에 처음 보이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자식은 태어나 3년이 지난 후에 부모의 품을 떠나니, 3년상은 천하에 통하는 상례이다’라고 했다. <예기>에는 ‘정에 맞도록 예절을 정하고, 친소와 귀천의 법도를 분별하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도(道)이다. 애통해 하는 자는 아픔이 오래 가리니, 이에 정에 맞게 3년상 예법을 만들었다’고 했다.

주자가 저술한 <가례>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르고 가묘를 세운다 했다. 가묘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가례>는 성리학과 함께 고려말에 수용되었는데, 공민왕 6년(1357) 이색 등이 3년상 행하기를 요청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이처럼 3년상은 선진적인 성리학자들이 먼저 시행했는데, 포은이 처음이다. <고려사> 정몽주열전은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상례와 제례의 풍속이 불교의 법식을 숭상했는데, 정몽주가 처음으로 <가례>를 따르게 하고, 스스로 가묘를 세워 선조 제사를 받들었다.’

함부림이 찬술한 포은의 ‘행장(行狀)’에는 구체적으로 ‘당시 상제가 문란하여 사대부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하는데, 부모가 돌아가시자 홀로 여묘하여 애도와 상례를 다했다. 나라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렸다’고 했다. 사대부들이 백일만에 탈상하는 것은 ‘부처를 받들고 승려를 대접하는’ 불교식 상례였다. 포은이 ‘상례를 다했다’는 것은 불교식 장례를 하지 않고 <가례>의 3년상을 치렀다는 뜻이다. 당시 3년상은 ‘나라에서 이를 행하는 자는 만 명에 혹시 한 사람이 있다’고 할 만큼 희소했다.

◇정상인과 길재

앞에서 본 고려시대 언양 효자 3인은 여묘와 3년상을 거행했다는 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은 고려 말 언양이라는 궁벽한 고을에서 불교식 장·제례를 거부하고 유교식 가례와 여묘를 시행한 선각자이다. 이들이 어떻게 성리학을 접하고 여묘와 3년상을 거행했을까? 포은의 교화를 거론하지 않으면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다.

언양의 효자 3인을 왜 포은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는가? 이들의 3년상과 여묘 거행이 이웃 고을보다 먼저 나타나기 때문이다. 울산의 경우 3년상, 여묘를 거행한 최초의 인물은 세종 10년(1428)에 정려된 송도이다. 경주도 최초의 인물은 태종조에 여묘 3년으로 정려된 남득온이다. 포은의 고향 영천에는 세종 8년(1426)에 여묘 3년으로 정려된 이감이 있다. 모두 조선 초기의 인물이다. 예외로는 언양과 접해있는 양산에 고려의 효자로 박창이 3년을 여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언양이란 벽읍에서 대읍보다 성리학 실천윤리가 먼저 도입된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포은의 교화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포은의 적소가 요도라는 무인지경이 아닌, 언양현 치소 인근의 어느 동리이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도전·권근처럼 거주의 제한 없이 사람을 만나고 교육할 수 있는 여유로운 유배생활을 누렸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알려주는 인물이 정상인이다. 정상인의 스승 야은 길재(冶隱 吉再)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공민왕 2년~조선 세종 1년(1353~1419)의 관원 겸 학자이다. 18세에 박분에게 나아가 <논어> <맹자>를 읽었고, 개경에서 포은과 이색, 권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포은이 성균관대사성일 때 성균박사로서 봉직했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마다 3년상을 치렀고, 스승 박분과 권근이 사망하자 3년 심상을 지냈다. 공양왕 2년(1390) 고려 멸망을 예견하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교육에 전념하니 원근에서 학도가 모여들었다. 이로써 훗날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정여창을 잇는 영남사림파가 형성되었다.

야은은 세종 원년(1419)에 사망했다. 그가 귀향하여 교육에 종사한 것은 고려말 2년을 포함하여 모두 21년간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상인을 굳이 고려시대 인물로 기록한 것은 야은의 귀향 초기에 문하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그는 어떻게 야은을 알았을까?

◇언양현 치소 인근 보수주인

포은, 야은과 정상인의 사승(師承) 관계는 이러하다. 포은의 언양 치소 인근 적소에 동리의 젊은이들이 찾아와 학문과 예법을 배웠을 것이다. <헌양잡기>(1915) 하북면조에 ‘향산은… 처사 정상인이 살던 곳(香山… 處士鄭尙仁 故居)’이라고 했다. 향산은 오늘의 울주군 상북면 향산리인데, 태화강 상류를 사이에 두고 길천리와 지근 거리에 있다. 처사는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면서도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데, 그는 언양 유학의 선구자로서 근래까지 지역의 인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유배에는 보수주인(保授主人)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수령이 유배 온 죄인을 관내의 민가에 맡기고 그 주인에게 보호, 감시하게 하는 것이다. 고려말에도 이 제도가 있었을 터이니, 앞의 정도전과 권근의 유배 중 활동이 이를 말해준다. 보수주인은 죄인이 고관일 경우 그로부터 선진 지식 습득과 자식의 교육 등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로써 추론하면 포은은 향산리 정상인의 집에 기거했을 것이다. 보수주인은 그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는 포은으로부터 신지식과 예법을 습득할 수 있었고, 이웃의 신계은, 정종문도 동참했을 것이다. 그는 포은으로부터 야은을 알게 되었고, 포은이 개경으로 돌아간 뒤 야은이 향리에 귀착하자 문하에 들어가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그가 3년을 심상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포은의 언양 적소는 상북면 향산리의 한 민가였다. 조선 후기 언양 반구서원을 창건한 주역들은 상북면 일대의 유생들이다. 서학에 대응하여 동학을 수용하고, 언양 3.1만세운동과 사학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의 진원지도 이곳이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북면이 신라 거지화현 이래 고려말까지 현청이 자리잡아 포은이 유배오기도 한 언양 고을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송수환 전문가·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전 연구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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