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 박사 본보 연재물 통해

조선 후기 ‘남외성’ 존재 밝혀

왜성의 돌 가져와 방어성곽 쌓아

이순신 후손 이원희가 축성 지휘

▲ 영좌병영지도(왼쪽)와 울산시 중구 병영동·남외동 일원의 위성사진(오른쪽).
#임진왜란이 끝난 뒤 울산사람들은 왜구가 쌓은 울산왜성 돌을 빼내 도시 방어를 위한 ‘남외성’을 새로 쌓았다.

#축성을 진두지휘했던 인물은 이원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였다. 그는 임란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이다.

조선중후기 울산지역사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송수환 박사가 본보에 연재하는 ‘이어 쓰는 울산史에세이’를 통해 이같은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조선후기 울산에는 ‘남외성’이라는 성이 존재했다. ‘남외성’은 그 동안 지역사가 한번도 다루지 않았던 텍스트다. 1850년대 지어진 남외성은 근대 이전에 축조된 울산의 성곽 문화재 중 가장 후대에 추진된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옛 지도 ‘영좌병영지도’가 그 존재를 확실하게 규명 해 준다.

영좌병영지도 중앙에 위치한 병영성에는 동·서·남·북 성문과 누각이 표시돼 있다. 성 내외의 주요 건물도 확인된다. 성 밖에는 진장촌(陣場村), 곽남촌(郭南村), 동천교주막(東川橋酒幕), 내황(內隍) 등의 동리가 기록되어 있다. ‘남외성’은 병영성 아랫쪽으로 내려 와, 큰 연못을 끼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가로로 길쭉하게 표기 돼 있다.

울산 중구는 수년 전 도시 정체성 복원 차원에서 중구 관내 6개의 성곽을 재조명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6개의 성곽은 병영성, 울산읍성, 울산왜성, 계변성, 고읍성, 반구동 토성이었다. 하지만 송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앞으로는 6개가 아니라 7개의 성곽이라고 수정돼야 한다.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지역사와 도시재생 전문가의 후속 연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부분이다.

남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고증이 되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영좌병영지도의 표시를 분석하면 남외성은 병영성에서 정남향으로 떨어져 있다. 지금의 동천과 가까우며, 무엇보다 같은 지도 상에 표기된 저수 공간 중 가장 규모가 큰 연못과 인접 해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박문태 울산중구문화원장은 “원래 복산동 일대부터 병영, 서동, 남외동에 걸쳐 크고 작은 연못과 늪이 많았다. 지금은 대부분 메워져 새로운 시설물이 들어섰다. 1970년 건립된 옛 울산공설운동장(지금의 울산종합운동장)도 원래는 큰 연못을 메워 만들었다. 괄목할만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다니 고무적이다. 위치규명 등 역사고증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박사의 이번 연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로 기록된 충무공과 울산의 임란사 유적과의 연결고리를 찾은데 있다. 무엇보다 울산왜성에 대한 후대의 해석을 수정해야 할 만큼 의미 있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울산왜성’은 ‘왜군이 남겨놓은 그들의 역사’라거나 ‘우리 역사에서 숨겨야 할 치욕의 현장’으로 해석됐다. 이는 개발·보존·조명 등 새로운 활용책을 찾을 때마다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게 됐다. ‘병영성 돌을 빼앗아 왜군이 쌓은 성’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왜성의 돌을 도로 가져 와 새로운 방어성곽을 쌓은 충렬의 도시’로 인식을 바로 세울 수 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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