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술에 물을 타 먹는다고?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술버릇이야?
나는 그런 것을 정말 싫어해!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 이것도 섞이고 희석된 건데요?

연극배우가 아니에요. 퀵이라니까요?
퀵 부르면 퀵 가야하고,
퀵 하고 태어나 퀵 하고 죽어버리는
그런 퀵이라고요. 퀵퀵퀵퀵퀵!

집주인 - 이예찬
 
◆등장인물
-남자1: 40대 남
-남자2: 20대 남
-남자3: 70대 남
-여자: 40대 여
-아이1
-아이2
 
 무대는 오른편과 왼편이 구분되어 있다. 오른편은 도둑들의 장소. 왼편은 우주 어린이 연극단원들의 장소다. 오른편은 집이다. 현관문이 있고, 현관문을 지나면 거실이 있다. 거실에는 소파와 벽걸이 tv, 탁자 등이 놓여 있다. 거실 뒤편으로 부엌이 보인다. 부엌에는 식탁과 의자들. 찻장, 냉장고 등이 보인다. 더 지나면 안쪽 방으로 향하는 문과 화장실 문이 보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2층은 보이지 않는다. 왼편은 무대 안의 무대 구성이다. 오른편 보다 면적이 좁아도 괜찮다. 검붉은 고전적인 암막 커튼으로 막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할 수 있다. 왼편의 무대 구성은 이야기 별로 바뀐다. 
 
 왼편의 무대 안의 무대는 암막 커튼이 쳐져 있다. 오른 편의 무대만 조명이 들어와 있다. 회사원 복장의 남자1이 거리를 걸어간다. 현관을 지나쳤다가 잠시 멈춰서 두리번거린 후 몸을 돌려 다시 현관으로 다가간다. 현관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다. 현관문에 걸려있는 우유주머니를 뒤진다. 현관문 앞에 장식된 화분들도 모두 들었다가 놓는다. 마침내 현관문 아래에 깔려 있는 카펫에서 열쇠를 찾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을 뒤지기 시작한다. 꼼꼼하게 뒤진다. 2층 계단도 올라갔다 내려온다. 지쳐서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앉는다. 그때, 거리에서 남자2가 등장한다. 추리닝 차림에 바이크 헬멧을 쓰고 있다. 남자2도 남자1과 같은 행동을 한다. 열쇠를 찾지 못하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본다. 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고 들어온다. 둘이 만난다.
 
 남자1: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누구야!
 남자2: 누구야!
 
 침묵.
 
 남자1: 난 여기 집주인이다!
 남자2: 무슨 소리야! 내가 이 집 아들인데!
 
 침묵.
 
 남자1: (한숨을 쉬며 다시 소파에 앉는다) 들어와. 너도 도인이냐? 몇 년 차야?
 남자2: (주춤거리며) 예? 그게 무슨…
 남자1: 뭐야? 초짜야? 너도 도둑이냐고. 좀도둑.
 남자2: 그럼… 아저씨도?
 남자1: 그래 인마. 여기 정말 허탕이야. 겉만 번지르르한 것들이 요즘 너무 늘어서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니까? (사이) 뭐해? 여기 앉아. (소파를 가리킨다)
 
 남자2. 주춤주춤 걸어 들어온다. 신발을 현관에 벗는다. 소파에 다가가 남자1과 최대한 떨어져서 앉는다. 
 
 침묵.
 
 남자1: (남자2의 발을 보고) 뭐야? 신발 벗었어? 그러다 튀어야 할 때 어떡하게? 얼른 가서 신발 신고 와.
 남자2: 그래도… 남의 집인데요?
 남자1: 허, 참. 젊은 친구 순진하네. 남의 집이니까 신어도 되는 거지. 우리 집이었으면 나도 신발 벗었어.
 
 남자2.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다시 소파에 앉는다. 
 
 남자1: 아까 보니까 순간적으로 공갈 잘 치던데? 하는 짓은 영 초짜인데… 어디 연극배우 출신이야?    
 남자2: 아, 아니요. 중학교 때는 연극부였는데 관뒀어요.
 남자1: 왜? 
 남자2: 먹고살아야죠. (바이크 헬멧을 두드리며) 라이더가 연극배우보다 빠르잖아요? 빨라야 먹고사는 거죠. 요즘 사람들은 집 밖으로 안 나가려고 해서 퀵 서비스나 택배 없으면 못 살죠.
 남자1: 뭐야. 퀵이야? 근데 왜 도인이 됐데? 
 남자2: 사정이 좀 있어서요. (사이) 아저씨 근데 여기 정말 빈털터리에요? 밖에서 봤을 때는 집 좋아 보이던데요?
 남자1: 내가 말했잖아. 안과 밖이 다르다니까? 요즘 대부분이 그래. 옛날처럼 현금이나 금붙이 가지고 있는 집이 얼마나 있겠어? 모두들 인터넷뱅킹을 써서 그래. 나는 도통 그런 게 신용이 안 가던데 말이야. 인터넷 맞고 게임머니처럼 조잡해 보인다고나 할까? 오늘밤 전 재산이 날아간다고 해도 놀랍지 않지. (집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남자2를 보고) 그렇게 못 믿겠으면 뒤져보든가.     
 남자2: 아, 예.
 
 남자2. 슬쩍 일어나서 집 안을 뒤지고 다닌다. 2층도 다녀온다. 다시 소파에 앉는다.
 
 남자1: 어때? 뭐 없지?
 남자2: 예, 정말 그렇네요. 2층에 큰 세계지도가 있던데 그런 건 돈이 안 되겠지요?
 남자1: 뭐? 세계지도? 2층에 아무것도 없드만 뭔 세계지도야? 
 
 침묵.
 
 남자2: (한숨을 쉬며) 정말 되는 일이 없네요. 아저씨는 언제부터 이 일을 하셨어요?
 남자1: 나? 5년쯤 됐나? 이쪽에선 나름 오래됐지. 무엇보다 한 번도 학교에 안 들어갔다는데 의의를 두는 거지.
 남자2: 학교요?
 남자1: 교도소 말이야. 진정한 의미에서 학교지. 가르침 교(敎)에 훔칠 도(盜)! 어째 교도소만 들어갔다 나오면 훔치는 기술이 늘어서 나온다지? 도가 튼 선생들이 득시글거린다더군. 굴종하는 법을 배우려면 대학을 가야하고, 인생을 배우려면 교도소를 가야지. 
 
 침묵.
 

▲ 일러스트=곽영화
▲ 일러스트=곽영화

 남자1: 사실 우리 아들도 연극을 해. 유치원에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더라고. 조잡한 연극단 같은 거지. 대사를 외우면서 두뇌개발을 한다는 말에 아내가 홀라당 넘어가버린 거야. 
 남자2: 가정이 있으셨어요?
 남자1: 빌어먹을 일이지. 빌어먹다가 안 되니까 이렇게 훔치고 있는 거잖아. 아내는 아직도 내가 작은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줄 알아. 월급이 좀 밀리기는 하지만 내 자리가 있는 무역회사를 상상하는 거지. 이 양복 보여? 매일매일 다려준다니까? 그럼 나는 매일매일 구겨야 해. 다음 날이면 아내가 다시 다려야 하거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소주도 좀 뿌려줘야 해. 나보다 이 양복이 고생이지.
 
 침묵.
 
 남자2: 저는 부모님이 없어요. 있다면 수녀님이 있었죠. 수녀님은 좋았지만 성모 마리아는 싫었어요. 미사 때 머리를 숙여야 했거든요. 제게 빵을 나눠주는 사람은 수녀님이었는데, 감사인사는 모두 성모 마리아가 받더군요. 저는 그게 너무 이상하게 보였어요.
 남자1: 성당에 다녔나?
 남자2: 성당이 집이었죠.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편지를 쓰고 사진을 찍었어요. 군인 아저씨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지가 선생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맛있는 빵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성당 앞뜰에 모여 웃으면서 사진을 찍죠. 그런 사진이라도 보내줘야 다시금 빵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거든요. 일회용 사진기를 들고 얘들을 향해 김치! 하고 외치는 수녀님의 모습은…… 뭐, 그런 곳에 신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죠.
 남자1: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나 예수가 생각나. 최고의 금수저 아닌가? 신의 아들이니 말이야. 나중엔 상속세도 없이 천국을 이어받던데?
 남자2: 저와는 정 반대네요.
 
 침묵.
 
 남자1: 이제 그만 그 헬멧 좀 벗어봐.
 남자2: 사양할게요. 
 
 침묵.
 
 도둑들의 장소 서서히 암전. 우주 어린이 연극단 불이 들어옴. 암막 커튼을 두 아이가 연다. 등 뒤에 빨간 보자기를 매단 아이1이 쓰레기통에 박혀 있는 장난감 칼을 뽑는다. 
 
 아이1: 내가 바위의 검을 뽑았다!
 아이2: (무릎을 꿇으며) 선택받은 브리튼의 왕님!
 
 침묵.
 
 아이1: (장난감 칼을 다시 쓰레기통에 넣으며) 그게 아니라니까? 전지전능하고 태어날 때부터 브리튼의 왕이 될 운명이며, 요정들의 축복을 받았고, 패배하지 않는 기사이며, 원탁의 기사들의 충성을 서약 받은 위대한 아서왕이시여! 잖아. 너는 왜 이렇게 대사를 못 외우니?
 아이2: (일어나며) 그럼 나도 아서왕 할래. 왜 너만 아서왕이야?
 아이1: 바보야. 아서왕은 한 명인데 어떻게 같이해. 너는 시민이야. 
 아이2: 왜 아서왕이 한 명인데. 그냥 여러 명으로 하자. 내가 바위의 검을 뽑았다! 나도 이 대사하고 싶어.
 
 침묵.
 
 아이1: 아서왕이 아니면 바위의 검은 뽑을 수 없거든? 아서왕은 선택받은 사람이야. 내가 아서왕이거든?
 아이2: 뭐래. 쓰레기통에서 칼 뽑는 거면서.
 아이1: 너 선생님한테 이른다? 내가 아서왕이라니까?
 아이2: 일러라? 나도 아서왕 할 거다 뭐!
 
 침묵.
 
 아이1: 그럼 너는 멀린을 시켜줄게.
 아이2: 멀린이 뭐야?
 아이1: 멀린은 마법사야. 지팡이를 들고 다녀.
 아이2: 그럼 할아버지야? 난 할아버지는 싫어. 안 해! 우리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늙으면 잘 죽어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칠팔월에 죽어서 땡볕에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침묵.
 
 아이1: 아이 참! 멀린은 위대한 마법사야. 사람들을 잠재울 수 있고, 변신할 수 있고, 거대한 물건을 움직일 수 있어!
 아이2: 아! 그럼 멀린은 정치인이구나?
 아이1: 정치인이 뭔데?
 아이2: 혼자 떠들어서 사람들을 재우고, 막 말을 바꾸면서 변신하고, 자기가 거대한 무언가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우리 아빠가 말해줬어.
 아이1: 너 자꾸 이럴래? 네가 계속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까 선생님이 아서왕을 안 시켜 주는 거야. 
 아이2: 쓸데없지 않아! 우리 아빠는 무역회사에서 일해!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야!
 
 침묵.
 
 아이1: 어쨌든 멀린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야. 네가 멀린을 해. 내가 아서왕을 할게. 멀린은 예언자이기도 해. 멀린이 아서왕의 앞날을 예언해 주는 거야.
 아이2: 예언자라고? 그럼 내가 예언해도 돼? 
 아이1: 그래. 좋아.
 아이2: (멀린의 목소리 흉내) 아서, 네가 바위의 검을 뽑게 될 운명이었듯, 너는 아내와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서 죽게 될 운명이야. 모든 건 운명이지!
 
 침묵.
 
 우주 어린이 연극단의 장소 암전. 아이들이 암막 커튼을 닫는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는 도둑들의 장소.
 
 술에 취한 남자3 등장. 비틀거리며 길을 걷는다. 현관문 옆에서 오줌을 갈기고, 트림을 한 다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 1,2를 본다. 
 
 남자3: 너희들 누구야! 내 집에서 뭐 하는 짓거리야!
 남자1: 젠장! 튀어!
 남자2: 어디, 어디로요? 
 남자3: 동작 그마안!
 
 남자1, 남자2 멈춘다. 남자3 신발을 벗고 소파에 앉는다.
 
 남자3: (지휘자처럼 두 팔을 휘청거리며) 지금 당장 신발을 벗고, 집주인에게 갖춰야 할 예의를 갖춰서 나를 대하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인생에 빨간 줄 하나씩 새겨서 끝내는 오선지를 만들어버릴 줄 알아! 그 오선지 끝에는 도돌이표가 있는 놈으로 말이야! 이 주변에 CCTV가 몇 대나 있는 줄 알아?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이 집안 구석구석에도 내가 홈캠을 설치해 놨다고! 도망칠 거면 도망 쳐봐! 그 순간 혼쭐날 줄 알아! 
 남자1: 아이고 영감님! 한 번만 눈감아 주셔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저는 작은 무역회사를 다니는 사람인데, 카탈로그 하나 들고 방문 판매 온 겁니다.
 남자2: 한 번만 봐주세요! 저는 퀵 알바를 하는 대학생인데, 물건 배달 때문에 들어온 겁니다.
 남자3: 헛소리 말고 당장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와! 내가 어린이집에서 연극을 가리키는 사람이야! 파트타임 강사지만, 진실과 거짓은 충분히 구별할 수 있지! 빨리 신발 안 벗어?
 
 침묵. 
 
 남자1,2 현관에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온다. 남자3, 소파에 손짓한다. 남자1,2 소파에 앉는다.
 
 남자3: (소파에서 일어나 찻장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끄윽, 그러니까 너희들이 성실한 손님들이라고? 물론 나는 믿지 않지만, 그렇게 얘기하니 대접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러니까 집주인으로서 말이야. 의무가 있는 거거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박하게 대하면 안 된다는 성경의 낡은 교훈을 새삼 상기시킬 것도 없이 말이야.
 
 남자3. 찻장으로 가서 찻장 속에 있는 위스키, 진, 보드카, 럼, 브랜디, 테킬라 등 술병을 차례로 탁자 위에 늘어놓는다. 끝으로 하이볼 글라스 세 잔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남자3: 솔직히 나는 오래도록 이 날을 기다려 왔어. 일을 끝낸 다음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서도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술잔을 채운다) 자, 한 잔씩 들어. 너희들이 내 집에 멋대로 들어왔으니 그 벌주로 치자고.
 남자1: (술잔을 들며) 좋아요. 어차피 슬슬 양복에 술을 뿌려야 할 때가 다가왔는데, 오늘로 하는 거죠. 얼음은 없나요? 저는 온더록스를 좋아하는데요?
 남자3: (격분하며) 뭐! 술에 물을 타 먹는다고?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술버릇이야? 나는 그런 것을 정말 싫어해! 증오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어! 술에 물을 타먹는 것들, 리큐르를 섞어서 칵테일을 만들어 먹는 것들, 그 자체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 그런 모든 희석된 것들을 말이야! (벌떡 일어나 비극 배우처럼) 타협적이고, 상업적이며, 예술을 더럽히고, 흰색보다는 검은색을 좋아하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평가에 예민한 귀를 가지고 안절부절못하는 당나귀며, 이미 만들어진 길은 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바다를 항해할 때는 나침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돈에 굴복하고, 명예의 노예며,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 자기 무덤도 찾아가지 못하는 늙은 코끼리 같은 것들!   
 남자2: (헬멧 바이저를 열고 재빨리 한잔 마시고 다시 닫는다. 위스키 병을 자세히 살펴보며)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 이것도 섞이고 희석된 건데요?
 
 침묵.   
 
 도둑들의 장소 서서히 암전. 우주 어린이 연극단 불이 들어옴. 암막 커튼을 두 아이가 연다. 아이1 검은 옷을 입고, 개미 머리띠를 하고 의자에 앉는다. 아이2 녹색 옷을 입고, 베짱이 머리띠를 하고 바이올린을 들고 자세를 잡는다. 아이2가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작동시킨다. 바흐 파르티타 3번 가보트와 론도가 흘러나오고 아이2는 자신이 바이올린을 켜는 척을 한다. 노래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아이1: 그만! 바이올린은 이제 지겨워! 배짱아, 춤춰봐.
 아이2: (카세트를 멈추지 않고 바이올린만 내려놓는다) 예, 개미님. 무슨 춤을 출까요?
 아이1: 탭댄스!
 
 아이2, 탭댄스를 춘다.
 
 아이1: 훌라!
 
 아이2, 훌라춤을 춘다.
 
 아이1: 룸바!
 
 아이2, 룸바를 춘다.
 
 아이1: 살사!
 
 아이2, 살사댄스를 춘다.
 
 아이1: 발레! 아라베스크!
 
 아이2, 아라베스크 자세를 취하려다 넘어진다. 
 
 아이1: 일어나! 개다리 춤!
 
 아이2, 일어나서 개다리 춤을 춘다.  
 
 아이1: 그만! 잘했어. 내일도 우리 집에서 재워주고 먹여주지. 
 아이2: (카세트를 끈다) 감사합니다. 개미님! 개미님 덕분에 오늘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저의 입은 개미님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하고, 저의 두 손은 개미님께 아름다운 연주를 해 드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아이1: 쯧, 쯧, 베짱아, 베짱아. 여름날의 그 용기는 다 어디 갔니? 위대한 예술가 흉내를 내던 베짱이가 겨울이 되니 아무짝에 쓸모없는 광대가 되었구나.
 아이2: (비굴하게) 예, 개미님. 예술이란 먹고사는 것 이후의 문제여서 그렇습니다. 여름에는 베토벤이든 바흐든 제 앞에서 멍청한 범재에 불과하지만 겨울이 되면 풍족한 자산가이신 개미님만이 위대하십니다. 빵이 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죠.
 
 침묵.
 
 아이1: (의자에서 일어나며) 후유! 실수 없이 잘했다. 그치?
 아이2: (베짱이 머리띠를 벗으며) 왜 맨날 나만 이런 역할이야? 춤추는 거 힘들단 말이야.
 아이1: 그렇다고 내가 베짱이를 할 수는 없잖아.
 아이2: 왜 없는데?
 아이1: 우리 엄마가 맨날 선생님한테 전화하는걸? 이번 부모 참여수업 때 꼭 내가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말이야. 
 아이2: 개미가 주인공이야?
 
 침묵.
 
 아이1: 다시 한 번만 연습해 보고 이제 쉬자.
 아이2: 나는 싫어! 애초에 선생님은 요즘 시대를 너무 몰라. 할아버지라서 그런가 봐. 요즘은 노래하고 춤춰서 돈 많이 번단 말이야. 진짜 베짱이가 있다고.
 아이1: 그런가? 겨울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근데 왜 다들 힘들다고 하는 걸까?
 아이2: 모두 베짱이가 되고 싶은데, 개미처럼 살아서 그래. 그래서 나중에 진짜 힘든 베짱이를 보면 도와주지는 않고, 욕하고 괴롭히고 싶어지는 걸 거야. 
 
 침묵.
 
 아이1: 우리 엄마는 나보고 크면 공무원이 되라고 하는데, 너 그게 뭔지 알아?
 아이2: 공무원? 잘 모르겠지만 숫자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계산하는 일이 아닐까?
 아이1: 숫자가 들어가 있다고?
 아이2: 응, 공무원이라며? 숫자 공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그렇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뒤에 있는 무는 한자 시간에 배웠잖아. 없을 무(無)일 거야. 그럼 이것도 영이네. 마지막 원은 영어 같은데? 하나? 일? 이것 역시 그렇게 큰 숫자는 아니야.
 아이1: 그럼 우리 엄마는 내가 커서 영, 없을 무, 하나 가 되길 원한단 말이야? 너희 엄마는 너보고 크면 뭐 하래?
 아이2: 래퍼나 유튜버 
 
 침묵.
 
 우주 어린이 연극단의 장소 암전. 아이들이 암막 커튼을 닫는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는 도둑들의 장소. 모두 취해있다. 흐트러진 차림새.
 
 남자3: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지. 칼 한 자루를 날카롭게 벼리라고. 그래서 벼르고 벼렸어. 그리곤 나를 버렸지. 너무 많이 갈아서 모두 닳아 없어져 버렸거든. 
 남자2: 저는 뭐, 좋아서 퀵을 하고 있는 줄 알아요? 모두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라는 사실은 그렇다고 쳐도, 톱니바퀴 중에서 마모되면 가장 먼저 갈아 끼우는 그런 톱니바퀴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저는 떠나고 싶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요.
 남자1: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지. 배우의 눈물은 믿을게 못된다지만 우리 모두 배역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나? 나는 지난 5년간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어. 나라고 부끄럽지 않겠나? 다람쥐가 열심히 모아 놓은 도토리를 훔쳐 가는 시궁쥐가 된 것이?
 
 침묵.   
 
 남자2: 폭풍이 치던 바다. 요나는 배 밑창에 숨어있었어요. 웅크려서 벌벌 떨었어요. 하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죠? 차라리 갑판에 나가 양동이로 물이라도 빼내야죠. 배 밑창에서 죽음을 기다리라니요? 산 제물이 되라니요? 저는 할 수 없어요.
 남자1: 나는 어려운 말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 PO니, FOB니, DDP니, 다 헛소리 같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동남아 바이어들 기분이나 맞춰주려고 폼 나는 비유나 수식어 따위를 연습하는 것도 지겨워. 나는 뉴스에서 진실과 거짓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그냥 간단하게, 진실 된 말만 하고 싶어. 슬프다! 그러니 우리 힘내자! 같은 말을 하면서 살고 싶어. 
 남자3: 도대체 훌륭한 극언어란 무엇일까? 보다 이런 것이겠지. 고요한 입술, 삼각 물방울, 정글의 짐승, 자조모임, 아버지의 머리, 파도파도 끝이 없는 파도, 즐거운 학문, 노예가 된 산책자, 뜯어 먹히는 목련.
 
 침묵.
 
 남자1: 외롭다.
 남자2: 왜 이럴까?
 남자3: 외침!
 남자1: 왜소한 가장
 남자2: 외람되지만
 남자3: 왜가리 머리
 남자1: 외상!
 남자2: 왜긴 왜야
 남자3: 외국인 노동자 
 
 침묵.
 
 남자3: 사실 나도 너희들과 같은 도둑놈일지도 몰라. 인생이란 영원히 남의 집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도둑질 같은 것이 아닌가? 마음 뉠 보금자리 하나 없고, 타인의 행복을 훔쳐 먹으며, 끝내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 못해 아버지와 한 몸이 되었다는 정신병자의 옆자리에 묶여서 그에게 알랑방귀를 뀌어야 할지, 욕을 퍼부어줘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거지.
 남자2: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 모든 고통이 훗날 저의 피와 살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저 개인의 삶에 역사를 투영해보는 거죠. 인류의 번영이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듯 말이에요. 의학이 나치들이 만들어낸 유태인의 시체를 해부하며 발전하였고, 우주공학이 얼마나 정확하게 미사일을 상대 진영에 날려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 속에서 발전하였듯, 제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이 앞으로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으세요?  
 남자1: 세상은 대비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법이지. 예를 들어 볼까? 섹스는 가볍지. 그 결과로 태어나는 아기는 무겁고 말이야. 여기서 말을 이어가 보자고. 이렇듯,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무겁지. 죽는 것이 가벼운 만큼만 말이야. 나도 그래.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거지. 내 인생은 무겁고, 내 존재는 가볍지.
 
 침묵.  
 
 남자3: 술만 들어가면 항상 우울한 이야기가 나온단 말이야.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그런 것 같아. 감상적이 되어가는 걸까? 
 남자2: 우울이라. 진짜 우울하다는 것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에요. 실제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장마철 덥고 습한 방 안에서 창문을 열어야 할까 닫아야 할까 고민하는 거 말이에요. 열면 덥고 습한 공기가 들어오고, 열지 않으면 환기가 안 돼서 답답하거든요. 특히 에어컨도 없는 제 반지하는 더 그래요.  
 남자1: 우울이라는 것도 유전되는 거고, 중독되는 거지. 임산부가 오피오이드 마약 중독자라고 생각해봐. 아기를 출산하고 탯줄을 끊는다면, 어머니에게서 공급받던 마약이 끊기고 아기는 금단증상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거지.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의 속성을 가진 오피오이드 마약 중독자가 되는 것, 이게 우리들의 우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태어나기도 전부터 윗세대에게서 내려받고, 우리도 아랫세대를 중독 시키는 거지. 
 남자2: 우리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해요. 공허하기만 하잖아요.
 남자3: 그럼 우리는 평생 벙어리로 지내야해. 도대체 진실로 이 세상을 경험하는 자, 누가 있단 말이야.
 
 침묵.
 
 남자3: 너무 공기가 가라앉았어. 환기시켜 볼까? 너희들 모두 이 집을 뒤져 봤겠지? 2층에 올라가 봤나? 그곳에 내가 우주망원경을 가져다 놨었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북극성이 보일 거야. 한번 볼 텐가?
 남자1: 무슨 소리예요? 2층엔 아무것도 없드만.
 남자2: 아니요. 2층에는 세계지도가 있다니까요?
 
 침묵.   
 
 남자3: 2층은 됐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러니까 직업에 대해서 말이야. (남자1을 가리키며) 직업이 뭐라고 했지?
 남자1: 무역회사에서 일합니다. 
 남자3: 요즘 무역은 국내 방문판매도 겸하나?
 남자1: 언제나 그랬죠. 당신이 상상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아요. 그건 제가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한 상상일 테니 말이죠. 저는 무역이라고 하면 무언가 큰일을 할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거물같이 말이에요. 외국바이어를 만나서 인상을 찡그리고, 계약 후 같이 고급 바에서 즐기는 거죠. 하지만 저를 좀 보세요. 작은 무역회사의 말단은 거래처를 따내기 위해 발로 뛰어야 해요. 허리를 굽신 거려야 하고, 손금이 사라질 정도로 손바닥을 비벼야 하는 거죠.  
 남자3: 자네는 그러니까… 세일즈맨이군. 
 남자2: (취해서 소리 지른다) 세일즈맨의 죽음!
 
 침묵.
 
 남자3: 고맙네. 교양 있는 친구. 자네 헬멧 좀 벗어봐.
 남자2: 사양하겠어요.
 남자1: 저 친구는 연극배우를 꿈꿨던 퀵 배달부에요. 
 남자3: 연극배우라니!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지. 자네와 나는 연관성이 있군. 
 남자2: 연극배우가 아니에요. 퀵이라니까요? 퀵 부르면 퀵 가야하고, 퀵 하고 태어나 퀵 하고 죽어버리는 그런 퀵이라고요. 퀵퀵퀵퀵퀵!
 
 침묵.
 
 남자3: 이건 내 생각인데, 어떤 탐탁지 않은 현실에 낭만성을 뒤집어씌우면 그 문제가 해결되어 보일 때가 있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해 보라고. 그러니까 자네가 외판원으로 일하다가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작품을 집필해낸다면, 아서 밀러가 마릴린 먼로와 결혼을 한 것과 동급의 서프라이즈가 자네 인생에 일어날지 누가 아나?
 남자1: 제발 그런 식의 말은 그만둬요!
 남자2: 퀵에 무슨 낭만이 있다는 거죠? 하루에 퀵을 수십 건 배달해야 해요. 무엇 하나 제 물건이 없는 거죠. 판매하지도 않고, 구매하지도 않는 언제나 과정일 뿐인 게 바로 저죠. 결말이 없어요.  
 남자3: 그래도 오토바이는 있지 않나.
 남자2: 할부가 남아 있는 거예요.
 
 침묵.
 
 남자1: 들어보니 드론 배송이 연구되고 있다는데?
 남자2: 그게 완성되는 순간, 모든 라이더들은 끝장나는 거죠. 폭주족이 되거나,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거나, 빌어먹을 낭만을 찾으며 가죽잠바 입고 선글라스 낀 멍청이가 되는 거죠. 그뿐인 줄 알아요? 지하철 퀵 하는 노인네들도 다 손가락만 빨아야 해요.
 남자3: 노인네들?
 남자2: 정확하게 말하면 65세 이상 노인네들이죠. 65세 이상이면 지하철 무임승차가 가능하거든요. 그걸 이용해서 지하철 퀵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거죠.   
 남자1: 그쪽도 나름 생태계가 있다는 거군. 
 남자3: 나름 낭만이 있는 세상이야.
 남자2: 배달대행에 밀려 사라지는 추세지만요.
 남자3: 그런데 자네, 정말로 헬멧을 벗지 않을 건가?
 남자2: 사양할게요.
 
 침묵.
 
 도둑들의 장소 서서히 암전. 우주 어린이 연극단 불이 들어옴. 암막 커튼을 두 아이가 연다. 아이1, 정장을 입고 있다. 아이2, 빨간 여자아이 원피스를 입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 대본을 들고 있다.
 
 아이2: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이제 드디어 여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어. (사이) 이건 카멜레온이라기보다는 지점토 같아.
 아이1: (대본을 보며) 이거 봐봐. 내가 잘못 읽은 거야? (사이) 셀… 러리… 맨의… 죽음.
 아이2: (대본을 보며) 샐러리맨? 야채맨 같은 건가? 슈퍼맨처럼 말이야. 어떤 영웅이야? 누구를 구해? 텃밭을 구하나?
 아이1: (대본을 넘기며) 누구도 구하지 못해. 구하기는커녕 죽는데? 자살하는 것 같아. 보험금을 타내려고 말이야. 자동차 자살이야.
 아이2: 야채맨이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동차 자살을 했다고? 그게 뭐야? 명작이라며?
 
 침묵. 
 

일러스트=곽영화
일러스트=곽영화

 아이1: 어쨌든 연습하자. 내가 주인공 윌리야. 그리고 너는 여자고, 내 정부야. (사이) 정부가 뭐지?
 아이2: 난 알아! 아빠가 TV만 보면 정부 욕을 하거든. 정부는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거야.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자!
 아이1: 그게 뭐야! 나는 야채맨인데! 그게 더 주인공 같잖아? 내가 대통령 할래!
 아이2: 싫어! 내가 정부야! 얼른 읽어!
 
 침묵.
 
 아이1: (대본을 들고 읽는다. 윌리처럼. 느끼하게) 해주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오.
 아이2: (여자처럼. 교태를 부리며) 나한테요? 이거 봐요, 당신이 날 어떻게 한 게 아니에요. 내가 당신한테 반했죠.
 아이1: (기뻐서) 나한테 반했다고?
 아이2: 모든 외판원이란 외판원은 다 봤지만 당신만 만점이에요. 재미 많이 보지 않았어요?
 아이1: 그래, 그래. (아이2를 껴안고) 지금 가야만 하나?
 아이2: 두 신데……
 아이1: 그러지 말고 더 있어요! (아이2를 끈다)
 아이2: (아이1을 뿌리치며) 잠깐! 잠깐만! 이게 맞아? 이게 야채맨이 대통령한테 하는 말이야?
 
 침묵.
 
 아이1: (대본을 뒤적이며) 뭔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어.
 아이2: 다음 이야기는 뭐야? 
 아이1: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스타킹을 줘.
 아이2: 야채맨이 대통령한테 스타킹을 준다고?
 아이1: 맞아. 그리고 내 아내는 스타킹에 난 구멍을 꿰매고 있어. 내가 아내에게 줘야 할 스타킹을 정부에게 선물했거든.
 아이2: 야채맨이 원래는 아내에게 줄 스타킹을 대통령에게 선물했고, 야채맨의 아내는 구멍 난 스타킹을 꿰매고 있다고? 야채맨은 영웅이 아닌 거야? 아니면 지나치게 영웅적인 거야?
 
 침묵.
 
 아이2: (대본을 던지며) 하지 말자. 뭔가 이상해.
 아이1: (대본을 던지며) 그래. 이게 정상일 리 없어.
 아이2: (대본을 밟으며) 뭔가 착오가 있는 거야.
 아니1: (대본을 밟으며)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아이2: 다음 무대를 준비하자.   
 
 침묵.
 
 우주 어린이 연극단의 장소 암전. 아이들이 암막 커튼을 닫는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는 도둑들의 장소. 모두 더욱 취해있다. 흐트러진 차림새. 모두 취해서 지껄인다.
 
 남자2: 젠장! 세계여행 가고 싶다! 아! 세계여행 가고 싶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세계여행 가고 싶다! 누구는 반지하에서 썩고 있는데, 누구는 하늘을 날아서 희희낙락이구나! 빌어먹을 오토바이! 빌어먹을 퀵! 빌어먹을! 빌어먹을! 아, 너무 취했어.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이 세상에는 신은 없지만 숙취는 있단 말이야! 빌어먹을! (쓰러진다)
 남자1: 돈! 돈! 돈! 돈이 필요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꿈? 꿈꾸지 말라 해! 집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벌써 네 달째 소득이 없어! 아침에 양복을 다려주면서 아내가 슬쩍 물어온단 말이야! (아내 흉내) 여보, 그 회사는 어떻게 된 게 네 달이나 임금도 안 주고 부려먹는데요? 씨발! 씨발! 가족들! 내게 그럴만한 힘이 있다면 ‘가족’이라는 단어를 ‘가좆’으로 바꿔버리겠어! 가좆같은 것들! 다아 좆같은 것들! (쓰러진다)
 남자3: (흥분해서) 나는 한때 잘 나가는 연출가였어! 어린이집에서 얘들하고 놀아줄 실력이 아니란 말이야! 예술은 완벽 한가 완벽하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니야. 예술은 기울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너무 낡은 것들이 많아! 다 기울여 버려야 해! 셰익스피어도 그래! (일어나며) To Be Or Not To Be!
 
 남자3, 햄릿을 연기한다. 
 
 남자3: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앙을 힘으로 막아 싸워 없앨 것인가? 죽어, 잠든다. 그것뿐이겠지. 잠들어 만사가 끝나 가슴 쓰린 온갖 고뇌와, 육체가 받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면, 그건 바라마지않는 생의 극치. 죽어, 잠을 잔다. 잠이 들면 꿈을 꿀 테지. 그게 걸리는군. 이승의 번뇌를 벗어나 영원의 잠이 들었을 때, 그때 어떤 꿈을 꿀 것인지, 이게 망설임을 준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끝없는 고통의 인생에 집착이 남는 법. 그렇지만 않다면야 그 누가 이 세상의 사나운 비난의 채찍을 견디며 폭군의 횡포와 세도가의 멸시, 버림받은 사랑의 고민이며 재판의 지연, 관리의 오만, 덕 있는 자에게 가해지는 저 소인배들의 불손,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딜 것인가? 한 자루의 단도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일. 그 누가 이 지루한 인생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진땀을 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죽은 뒤의 불안이 남아 있으니. 나그네 한 번 가서 돌아온 적 없는 저 미지의 세계, 결심을 망설이게 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지. 알지도 못하는 저승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재의 재앙을 받는 게 낫다는 결론, 이러한 조심 때문에 우리는 더 겁쟁이가 되고 결의의 저 생생한 혈색도 우울의 파리한 병색이 그늘져 충천하던 의기도 흐름을 잘못 타 마침내는 실행의 힘을 잃고 마는 것이 고작이 아닌가. 쉿, 어여쁜 오필리아! 숲속의 요정이여, 기도하거들랑 이 몸의 죄도 함께 용서를 빌어 주오. (사이) 봐봐! 너무 길잖아! 요즘 이렇게 하면 다들 잔다고! 요즘은 세 글자도 두 글자로 줄이고, 두 글자도 한 글자로 줄이는 세상이라고! 저 장광설. 마법 같은 한국어는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지. 햄릿은 이렇게 말하면 족해. (크게 외친다) 이런 씨이발! (사이) 봤어? 모두 들었어? 다 잠들었나? 나만 떠드는 거야? 대부분의 대사는 이런 씨발!로 끝낼 수 있다고. 다들 알아들었어? (침묵을 느낀다)
 
 긴 침묵. 
 
 남자3. 무대를 비틀거리며 걸어 다닌다. 독백.
 
 남자3: (팔을 벌리고 마임) 봐! 난 이게 좋아! 침묵! 침묵만이 완전한 언어라고 할 수 있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무슨 말이든 지껄여봐! 하지만 하나 알아야 할 게 있어. 그 말은 말 자체에 힘이 있는 게 아니고, 말 뒤에 찾아오는 침묵에 힘이 있는 거야. 모든 언어는 그것이 사라질 때 아름다워. 시끄럽게 떠들고, 입을 다물어봐. 언어가 지나간 자리를 느끼는 거야. 앞선 언어가 무의미의 공간 속으로 연기처럼 빨려 들어가면, 그 후에 남는 진한 고독을 맛보란 말이야! 평생 살면서 광대마저도 말하기보다 침묵하는 시간이 더 많은데, 왜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는 거야!
 
 침묵.
 
 남자3: 침묵, 침묵, 침묵, 침묵 (손나팔을 귀에 가져다 댄다)
 
 침묵.
 
 남자3: 침묵, 침묵, 침묵, 침묵 (손나팔을 귀에 가져다 댄다)
 
 침묵.
 
 남자3: 침묵, 침묵, 침묵, 침묵 (손나팔을 귀에 가져다 댄다)
 
 침묵.
 
 남자3: (웃는다) 다들 이게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나는 언제나 내 주량보다 많은 술을 마시고 나서야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 그런 내가 권하는데, 술을 마실 때는 주량 이상 마시면 안 돼. 주량 이상 마신다면 미지의 세계로 떠밀린단 말이야. 그러면 안 돼! 경계선 밖은 떠나는 게 아니야! 떠밀리는 거라고!
 
 침묵.  
 
 남자3: 비바람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기 전에 튼튼한 집을 지으란 말이야!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말이야! 이런 머저리들! 어떤 경계가 있다면 그것을 넘을 생각을 하기 전에 실수로라도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땅속에 파묻어 버리란 말이야! 너희들은 공산품이야! 조금이라도 아귀가 안 맞는다면 폐품처리된다고! 앗! 너! 조심해!
 
 침묵.
 
 남자3: 사람들은 그런 걸 못 견뎌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경계를 허무는 것을 말이지. (관객석에 다가가 마임을 한다. 관객석과 무대 사이에 벽이 있다. 남자3이 허공에서 문을 연다. 문 여는 소리. 손나팔을 만들고) 안녕하세요. 여러분? 무대를 잘 즐기고 있나요? 저는 남자3입니다. 아,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극작가가 이렇게 하라고 대본에 적어놔서 저도 어쩔 수 없답니다. 몰입이 깨지고 집중이 안 된다고요? 그거 잘 됐네요. Viva Brecht! 제가 남들 몰래 이 극의 결말을 알려드리자면, 정말 뭣도 없어요! 도대체 무슨 그럴듯한 의미들을 기대한 거죠? 순진하기 짝이 없군! 시간이 소중하다면, 화장실이라도 가는 척을 해서 빠져나가는 걸 추천 드립니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말고 변기에 앉아 계세요. 그게 이득이에요. (쓰러진다)
 
 도둑들의 장소 서서히 암전. 우주 어린이 연극단 불이 들어옴. 암막 커튼을 두 아이가 연다. 아이1 대본을 들고 있다. 아이2 은박지로 만든 갑옷과 빗자루를 들고 목마에 앉아 있다. 
 
 아이2: (감격하며) 드디어 내가 주인공이야! 대사도 완벽하게 외워왔다고!
 아이1: 좋아 내레이션 시작할게. (사이) 옛날 옛날에 라만차 마을에 사는 한 신사가 기사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신이 기사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돈 키호테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돈 키호테는 소작농인 산초를 시종으로 데리고 무사 수업을 떠났습니다. 
 아이2: (당당하게) 다들 나를 미치광이 보듯 하는군! 얼마나 타락한 정신들인가! 생각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모두 창을 들고 둘시네 공주를 찾아가야지! 아! 이런! 미치광이들의 눈동자에는 내가 미치광이로 비치는 것인가? 안타까운 사람들. 너희들이 생각하는 제정신이란 착각이며, 경계 밖의 악덕일 뿐이다!
 
 침묵.
 
 아이1: 돈 키호테는 자신의 사랑하는 말 로시난테를 타고 길을 가던 중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종 산초는 돈 키호테를 말렸지만 돈 키호테는 오히려 산초를 꾸짖었습니다.
 아이2: 산초! 산초야! 이제 농사를 지어서 정직하게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 씨앗을 심고, 물을 뿌리고, 자연의 축복을 기대하던 그 시대는 그리움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미래가 될 수 없다. 미래는 저기 보이는 거인에게 있는 것이다! 거인을 죽여라! (목마를 타고 달려 나간다)
 아이1: 그렇게 달려 나간 돈 키호테는 애마 로시난테와 함께 풍차의 날개에 떠받혀 나가떨어졌습니다. 
 아이2: (목마와 함께 쓰러진다) 마술사 플레톤! 어느새 거인을 풍자로 바꿔놨구나!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한 걸음을 떼었기 때문이다.
 
 침묵.
 
 아이1: 그렇게 돈 키호테는 애마 로시난테와 함께 뇌진탕으로 죽었답니다. 
 아이2: (벌떡 일어나며) 뭐? 그게 뭐야? 내가 받은 대본에는 둘시네 공주를 찾아갔었는데?
 아이1: (대본을 넘기며) 선생님이 어제 수정된 대본을 주셨어. 이게 맞아. 
 아이2: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너무 허무하잖아! 
 아이1: 잠깐만 기다려봐. 나 마지막 내레이션이 남았단 말이야. (헛기침) 아, 아,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란 끊어내지 못하는 습관의 작용일 뿐입니다. 그럼으로 돈 키호테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고개를 숙인다)
 
 침묵. 
 
 아이2: (빗자루를 던지며) 됐어. 나 안 해.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이게 뭐야?
 아이1: (대본을 넘기며) 다음 연극도 네가 주인공인데? 정말 안 해?
 아이2: (기대하며) 뭔데?
 아이1: 미운 오리새끼에서 미운 오리역이야.
 아이2: 정말? 나중에 백조가 되는 그 미운 오리?
 아이1: (대본을 넘기며) 아니, 여기에서는 자신을 백조라고 착각한 미운 오리야.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미운 오리 이야기야. (사이) 선생님이 여기 이렇게 메모해놨어. (선생님 흉내) 험험, 미운 오리새끼라고 제목 지었으면 미운 오리새끼가 나와야지 백조가 웬 말인가. 아이들이 읽는 동화라고 해서 거짓을 담는 건 비겁한 짓이다.  
 
 침묵.
 
 우주 어린이 연극단의 장소 암전. 아이들이 암막 커튼을 닫는다. 천천히 불이 들어오는 도둑들의 장소. 모두 깨어있다. 술이 덜 깼다.
 
 남자1: 도둑질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닐 거야. 아담과 이브도 선악과를 훔쳐 먹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꼈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 말이야. 파렴치한 시대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거든.
 남자2: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마다 비싼 외제차가 보이면 속도 내기가 쉽지 않아요. 살짝 긁기만 해도 낭패를 당하는 거죠. 같이 퀵하는 형들은 비싼 차에 치여 죽으면 비싼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저는 싸구려라도 좋으니 지옥에 가고 싶어요. 제가 죽어서 여행하고 싶은 곳은 잘 꾸며진 관광지 같은 곳이 아니라 현지 로컬들의 장소라고요. 그건 왠지 천국보다는 지옥에 가까울 것 같아요.
 남자3: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 강박이지. 나는 항상 강박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 연출은 항상 푸대접을 받았지. 나는 자신에 대한 불만족을 항상 대사와 행동에 포함시켰거든. 평론가들은 스토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주제를 강조하며 내 연출이 인위적이라고 비판했지. 하지만 그들도 인생을 살아간다기보다 스토리텔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야.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보라지. 그곳에 어디 자연스러움이 있던가? 우리들은 호흡마저 부자연스러워.
 
 침묵.
 
 여자가 길을 걸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여자: (놀라며) 당신들! 제 집에서 뭐 하는 거죠?
 남자1: 당신 집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여자: 제 집이라고요! 제가 보증금을 내고, 세를 내고, 가스비를 내고, 수도세를 내고, 전기 요금을 내는 제 집에서, 제 돈 주고 산 소파에 앉아 제가 구매한 양주를 오렌지주스 마시듯 들이 킨 거예요? 맙소사!
 남자1: (남자3에게) 당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여기 당신 집이잖아요?
 남자3: 사실… 나도 잘 몰라. 이곳이 우리 집이 아닐 수도 있겠지. 아무튼 나는 너무 취했으니 말이야.
 
 침묵.  
 
 여자: (손으로 이마를 짚은 다음 난장판이 된 거실을 둘러본다) 당신들 모두 취했군요! 이게 무슨 일이람! 설마 2층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진 않았겠죠?
 남자1: 아무것도 없던걸?
 남자2: 세계지도가 있던데, 혹시 가능하다면 저에게 주실 수 있나요?
 남자3: 우주망원경의 각도가 비틀려있을지도 모르지. 잠시 시간을 줘. 내가 다시 만져줄 테니 말이야.
 
 침묵.
 
 여자: (양주병들을 치우며) 미치겠군! 이런 주정뱅이들이라니! 얼른 청소하세요! 아침에 제 아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내일은 어린이집 부모 참여수업이라고요. 제 아들은 연극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단 말이에요. 빨리빨리 치워요! 안 그러면 당장 경찰에 신고해서 끌어낼 거예요! 큰일을 만들어 아들을 깨우긴 싫단 말이에요!
 남자1: (청소를 시작한다) 상냥하셔라! 
 남자3: (청소를 시작한다) 한 번만 눈감아 줘. 우리는 도둑놈들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 이 둘은 도둑놈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야. 
 남자2: (청소를 시작한다) 무슨 소리예요? 저는 대학생이라고요. 집을 잘못 찾아왔을 뿐이에요.
 
 침묵.
 
 여자: 이렇게 어질러 놓다니! 이 집에서 쓸만한 건 모두 긁어서 주머니에 넣은 것은 아니겠죠? 남겨둔 것 하나 없이 모두?
 남자1: 그럴 리가! 이곳은 정말 허깨비인걸? 집 주인이면 그 정도는 아실 텐데? 
 남자2: 정말 별게 없어요.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여자: 당신은 답답하게 그 꼴이 뭐예요? 헬멧 좀 벗어 봐요.
 
 침묵.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남자2를 바라본다. 
 
 여자: 헬멧 좀 벗어보라니까요? 얼굴 좀 보게.
 남자2: 사양할게요.
 
 침묵.
 
 남자1: 집주인이 말하잖아. 헬멧 벗으라니까?
 남자2: 불가능해요.
 
 침묵.
 
 남자3: 빌어먹을! 이제 그만 벗어! 
 남자2: (움츠려든다) 안돼요!
 
 침묵.
 
 여자: 내 요구가 부당했어요? 여긴 내 집이라고요! 헬멧 좀 벗어 봐요! 당신 수배범이야?
 남자1: 너 혼자 그렇게 고고하다는 거야? 우리 같은 놈들이랑은 얼굴도 마주하기 싫다는 거야? 어?
 남자3: 버르장머리 없는 놈! 헬멧 벗어! 당장 벗어! 내가 벗겨줄까? 설마 너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야?
 남자2: 안 돼!
 
 남자2. 헬멧을 감싸 쥐고 현관으로 도망치려고 한다. 여자가 막는다. 남자1과 남자3이 달려들어 남자2를 잡는다. 결국 헬멧을 벗긴다. 남자2는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무릎 아래로 파묻는다. 남자2의 곁을 나머지 세 명이 둘러싸고 있다.
 
 여자: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남자1: (손에 든 헬멧을 던지며)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뭘 숨기려는 거야?
 남자3: 얼굴을 보여 봐. 부끄러워할 것 없어. 무언가를 훔치진 않았잖아? 괜찮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너와 같다니까? 도둑놈이 아니야. 도둑놈이 아니라니까?
 
 남자2 흐느낀다. 무대, 서서히 암전. 남자2의 소리가 서서히 줄어든다.
 
 긴 침묵.
 
 완전한 암전.
 
 현관문 열리는 소리.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목소리: 다들 제 집에서 뭐 하시는 거죠?

 

이예찬
이예찬

■당선소감-이예찬 /  “지면만 주어진다면 닥치는 대로 쓸것”
지면이 주어졌다. 지면이 주어졌으니, 써야 한다. 우선 팬데믹으로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위로의 말을 전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특히 공연 연극계를 비롯한 대면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상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실 테다. 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 하나 싶지만, 그래도 기왕 주어진 지면이지 않은가.

팬데믹을 포함해 지난 몇 년간 세상이 급격하게 변한 것 같다.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AI와 로봇공학의 발달은 인간을 무용한 존재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줄 것인가. 기후 위기는 임계점을 넘었는가, 넘지 않았는가. 우주여행에 돈을 써야 하는가, 빈곤 해결에 돈을 써야 하는가.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불치병 환자들을 위해 질소 자살 캡슐로 존엄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전자 가위 기술을 발전시켜 불치병을 정복할 수 있는가. 예술은 쓸모 있는가, 없는가. 등등. 개인이 다루기엔 너무 큰 주제들 같지만, 그래도 기왕 주어진 지면이지 않은가.

이렇게 지면이 주어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앞으로 지면만 주어진다면, 닥치는 대로 써 볼 생각이다. 이번 지면을 마련해 주신 경상일보와 심사위원님. 펜에 잉크를 채워주신 오정국, 이만교, 유진월 교수님. 책상과 의자를 마련해 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선욱현
선욱현

■심사평-선욱현 /  “연극적 재미 가득…허무한 마지막에 더 현실감 느껴져”
‘연극이니까 이렇지. 이런 상황이 말이 돼?’ 라고 비현실성을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연극이고 그래서 영화, TV드라마와는 다른 연극만의 재미가 생겨난다. 비현실적이지만 공연을 보는 동안은 타당하고 생생하여 몰입되는 그 지점이 바로 ‘연극성’일 것이다. 

10편의 본심에 오른 희곡들을 만나며 그 지점에서 엇갈렸다. 비현실적인 부분이 허무하게 언어의 유희로만 끝나거나 다소 진부한 전개로 사실적인 것 같지만 도리어 사실성을 획득하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생생함이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들을 움직이는 어떤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모두 결정해버린 상황, 정해버린 주제를 전달하는 식의 극 전개 보다는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러나?’ 하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작으로 추천하는 ‘집주인’은 누구의 집인지 모를 집에 숨어든 도둑들의 수다와 연극하는 아이 1, 2의 여러 작품 연습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하는데 연극적인 재미가 가득하고 대사도 통통 살아있다. 다소 허무한 끝내기를 작품 안에서도 예고했지만 지금 우리 주변의 삶과 세계는 정말 ‘허무’해서 그런지 더 현실성있게 다가온다. 

실제 공연으로 올라간다면 연습과정속에서 작품의 재미가 더욱 배가될 거라는 기대도 생긴다. 신인 극작가의 탄생을 축하한다. 덧붙여 왕따 여고생 세 사람이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 하며 풀어놓는 이야기가 꽤 생생하게 다가왔던 ‘총’과 세대를 이어가며 가족부양에 세월을 보내야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쓸쓸한 그림을 보여준 ‘이미 냉동된 바 있으니 해동 후 재냉동 하지 마시오’가 최종 후보에 올랐음도 공개한다. 응모자 모든 분들의 정진과 건필을 염원한다.
□약력
-극작가
-한국극작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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