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글밭] 우연과 필연
2001-01-14 경상일보
명치끝이 찌르르 아파 왔다. 짧은 순간이었다. 이럴 땐 약간 긴 시간도 짧았다고 표현 할 수밖에 없다. 키가 크고 깡말랐던, 분명 그 사람이었다. 우린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니 출입문에서 부딪칠 뻔하였다. 2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잠시어찌할 바를 몰라 굳어졌고, 옆으로 피해 걸어가는데 등줄기가 서늘했다. 주말 오후, 나는 서울서 오는 친구를 마중 갔고 터미널 커피숍에서 그녀를 한참 기다렸었다. 20년만에 내린 폭설로 교통 대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밤중에나 도착할 것같다는 소식을 받고 찻집을 나오는 순간이었다. 결혼 후 처음 만나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그녀를 20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기고 다시 만날 기회를 가졌는데 날씨가 훼방을 놓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미국으로 여기저기 옮겨 사느라고 누구에게도 제 사는 형편을 알리지 않던 친구였다. 그런데, 우연히 소식을 들었다. 20년을 못 보고 살았는데 갑자기 하루가 십 년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린 예전처럼 의기투합하여 당장 만나기로 했고, 폭설에 관계없이 꼭 내려올 거라고 자신만만했었다. 그녀가 결혼해 고향을 떠난 때와 그 남자가 가난을 벗어 던지려고 희망의 땅을 찾아 간 것은 거의 같은 시기였다. 나 또한 그들이 떠난 고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옮겨 터전을 잡은 지 20년이 넘었다. 우리는 동시에 찻집의 문을 밀고 당겼던 것이다. 007영화에서 보았던 것 같다.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이 회전문을 계속 돌리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던 그런 장면이 새삼 떠올랐다. 찻집의 출입문이 회전문이었다면 좋았을 일이다. 비켜서 몇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안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면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가난을 핑계삼아 절대 나와 마주 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주 내 뒤를 밟았다. 비쩍 말라 더 커 보인 키 때문에 그림자도 길기만 했다. 그 남자의 외로움과 절망이 전염될까봐두려웠었다. 차라리 내 앞에 당당하게 서 주길 원했지만 그런 용기 마저 없던 남자였다. 내가 샤갈의 그림에 빠져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샤갈의 화첩에 짧은 편지를 끼워 보내 왔었다. 또 한번은 장정이 화려한 시집과 함께 편지가 왔었다. 그리고 떠나던 날, 긴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통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밤늦은 시간 다시 친구를 마중 나갔다. 우리는 누가 보던 말든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반가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20년의 간격이 있었지만 우리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찻집에 자꾸만 눈길을 주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기엔 이미 늦었는데 왜 마음이 쏠렸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