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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7호선 시대]근무태도 질책에 앙심 품은 부하가 술김에 경찰서장 사살
울산 성장의 시작 국도 7호선시대-(35)
(1) 김종신 서장 피살
2012년 12월 24일 (월) 이재명 기자 jmlee@ksilbo.co.kr

빨치산 가족이었던 김규식 순경
김종신 서장이 채용해 경찰 입문
울산교 남쪽 초소 경비 서던 중
장보러 다니던 장교부인 성희롱
문제 불거져 김 서장이 나무라자
서장실서 일 저저른 뒤 자살 시도


1953년 6월 7일 오후 1시 25분 울산 북정동 울산경찰서 서장실에서는 6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날 김종신(40) 서장은 점심 식사 후 서장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자신이 얼마 전 특채한 김규식(26) 순경이 들어와 총을 쏘았는데 이중 두발이 흉부를 관통했다. 

   
▲ 김종신 서장이 머물렀던 관사. 울산경찰서장 관사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1993년 경찰서가 병영으로 옮긴 후에도 한동안 서장 관사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민간인이 살고 있다.


김 순경이 총을 쏘기 전 김 서장은 총을 갖고 서장실로 들어온 김 순경을 향해 “왜 이 방에 총을 메고 들어왔느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김 순경은 대답은 않고 총을 쏜 후 김 서장이 피살된 것을 확인하고 자신도 죽으려고 자신의 흉부를 향해 총을 쏘았으나 이중 한발만 맞아 중상을 입었을 뿐 죽지 않았다.

이후 김 순경은 총소리를 듣고 서장실로 달려온 동료 경찰관들에 의해 붙잡혔다. 이것이 당시 전국을 놀라게 했던 김종신 서장의 피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곧 전국 뉴스가 되었다. 검찰국은 8일 오후 이선중 검사를 급파해 사건 현장을 검증했다.

김 서장이 피살될 당시 남과 북은 3년 동안 끌어온 6·25전쟁을 끝내기 위해 판문점에서 연일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과 북은 휴전 협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후방에서는 빨치산들의 활동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유능한 경찰관이었던 김 서장이 울산에 온 것은 밤낮 없이 준동하는 울산의 공비들을 척결하기 위해서였다. 울산에 오기 전 경정이었던 그는 울산경찰서장으로 오면서 총경으로 진급해 동료들의 축하를 받았다.

악연으로 끝난 김규식을 그가 특채한 것도 빨치산 소탕을 위해서였다. 김규식은 울산 범서 출신으로 빨치산 조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김 서장이 그를 채용한 것이었다. 6·25당시 울산에서 빨치산이 가장 많았던 곳이 대운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서생이었고 두 번째가 범서였다.

울산에 빨치산들이 얼마나 많았나 하는 것은 1951년 빨치산 소탕에서 산청경찰서가 1등을 했고 울산경찰서가 2등으로 표창을 받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1952년 3월 11일에는 울산경찰서가 공비 11명을 사살 내지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의문은 김규식이 왜 김 서장에게 총을 쏘았나 하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빨치산 가족들은 취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 순경으로 보면 김 서장은 은인이었다.

당시 언론은 김 순경이 김 서장을 살해한 것이 인사에 대한 불만 때문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울산경찰서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내용에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이일성(77) 전 도의원은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 전 의원은 김 순경이 김 서장을 죽인 것이 개인 앙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건 당시 삼신 마을이 있었던 울산교 남쪽 끝에 경찰 초소가 있었는데 울산경찰서 소속 순경들이 이 초소에서 초병을 섰다. 그런데 이 무렵 이 초소에서 자주 초병을 섰던 김 순경이 울산교를 드나드는 장교 부인들을 성희롱했고 이를 김 서장이 나무라자 앙심을 품고 김 서장을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 울산에는 전쟁 중 다쳐 후송 온 군인들이 많아 제23 육군병원이 주둔했는데 본원이 울산농고에, 제1 분원이 울산초등학교에, 제2 분원이 병영초등학교에 각각 있었다. 당시 병원장이 최영재 대령이었고 예비사단장이 권준 준장이었다.

따라서 본원이 있었던 울산농고 인근의 군의관 사택에는 장교부인들이 많이 기거했고 이들이 장을 보기 위해 매일 울산교를 건너다녔다. 당시만 해도 군의관 사택이 있었던 남구 지역에는 큰 시장이 없어 장교부인들이 울산교를 건너 옥교동 중앙시장과 성남동 5일장에서 장을 본 후 돌아가곤 했다.

이 때 초병을 서고 있었던 김 순경이 장교부인들을 희롱하자 이 소문이 최 대령을 거쳐 권 준장까지 보고되었고 권 준장이 김종신 경찰서장에게 이에 대한 항의를 하자 김 서장이 김 순경을 나무랐다.

이러자 화가 난 김 순경이 술을 마신 후 경찰서로 들어와 서장실에 있던 김 서장을 쏴 죽인 것이다.

김 서장은 생전에 1남 1녀를 두었다. 장례식은 울산경찰서에서 가까운 동헌에서 열렸는데 울산농고 밴드부가 연주했다. 장례식에는 일반적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나 그리그의 ‘조곡’을 연주한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울산농고에서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던지 이날 장례식에는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이 연주됐다는 웃지 못할 얘기가 전해온다.

부하에게 후하고 동기간에 인정이 있던 김 서장은 특히 연설을 잘 해 각종 행사장에서 명연설을 했다.

울산 인근에서 근무하는 경찰 동기들이 모두 모인 장례식장에는 아직 어린 두 자녀가 참석해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시신은 군 앰블런스로 이동되었는데 앰블런스가 동헌을 빠져 나갈 때는 평소 김 서장을 존경했던 부하 경찰들이 영초당 한의원 앞까지 따라가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김서장은 울산에 머무는 동안 관사에서 살았다. 당시 경찰서장 관사는 경찰서에서 양사초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편 골목 안에 있었다.

건물은 1층 기와집이고 건물 앞에는 제법 큰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서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홀이 중앙에, 그리고 홀 양편으로 방이 있었다. 옛날에는 집 뒤 빈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빈터에 임시 건물을 세워 기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외형적으로 변했지만 지금도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1993년 경찰서가 병영으로 옮긴 후에도 한동안 서장 관사로 사용되었는데 최근에는 건물이 너무 낡아 민간인이 살고 있다.

궁금한 것은 김 서장에게 총을 쏘았던 김규식의 행방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이런 항명 사건은 극형을 면키 어려웠다. 그러나 김 순경의 고향인 범서에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사건 후 김 순경의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범서에서 만난 노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어릴 때 울산경찰서장이 총을 맞아 죽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사건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노인들은 사건 당시 김규식의 동생이 울산제일중학교를 다녔는데 곧 다른 지방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울산중부경찰서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울산중부경찰서에 혹 김 서장의 흔적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여러 번 찾았지만 현 근무자 중 김 서장은 물론이고 당시 사건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는 달리 울산 사람들 중에는 아직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건 후 김 서장 가족들은 부산으로 이사를 가 부인이 대신동에서 하숙을 하면서 살았는데 울산문화방송 상무를 지냈던 최영수가 경남상고를 다닐 때 이 집에서 하숙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갈 무렵 울산초등학교를 다녔던 김 서장의 아들 효일은 경남중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장교로 월남전에 참여하는 등 활달하게 살았다. 그는 SK 이사였던 박대윤씨가 경남고 동창이 되어 학창 시절에는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울산으로 자주 와 박씨를 만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 지병으로 작고했다.

또 김 서장이 피살되었을 때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효일의 여동생은 부산으로 간 후 부산사범고에 입학해 수재라는 칭찬을 받았으나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울산에서 김 서장의 흔적은 북정동 옛 울산경찰서 앞 충혼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탑은 1955년 3월 울산경찰서 주관으로 세워졌다. 이 탑에는 광복 후 한국동란 종전까지 울산에서 건국과 자유 수호를 위해 순직한 경찰관과 공무원 그리고 의용경찰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이름이 새겨진 희생자는 모두 148명이다. 김종신은 이중 제일 먼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새겨진 계급을 보면 김 서장은 총경이 아닌 경무관이 되어 사망 후 일계급 승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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