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은 상주 사람. 성은 이 씨였지만 견 씨로 고쳤지. 아버지는 아자개로, 농사꾼이다가 장군이 되었고. 견훤의 어머니가 처자 때였어. 한 사내가 밤마다 방에 들어와 자고 간다고 아버지한테 말했지. 아버지 왈, “긴 실을 바늘에 꿰어 사내의 옷에다 꽂아둬.” 딸은 시키는 대로 했어. 다음날, 실을 따라 가보니 꺼깨이(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거든. 이
백제 제30대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 서동의 어머니는 과부였지. 부여의 남쪽 연못가에 살다가 용과 정을 통해 서동을 낳았대. 용이 왕을 뜻한다면, 그가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라고 전해지기도 하니, 법왕의 혼외자식이겠지. 서동은 머리가 좋고 용기가 남달랐는데, 마장수로 홀어미를 모시고 살았어.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신라에서 가장 예쁘다는 소문이 났지
우태는 소서노의 전 남편, 소서노는 우태가 죽자 동부여에서 건너온 고주몽의 비가 되었지.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고. 주몽에겐 두 아들이 있었으니 동부여에서 낳은 유리와, 소서노가 낳은 온조라. 온조의 형, 비류는 우태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해.한 나라의 시조가 되려면 태양신의 권위를 이어받으려고 아버지를 버리곤 해. ‘해의 모습’을 자칭한 북부여의 ‘
신라의 마지막 임금은 제56대 경순왕.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 뒤에 꼭두각시 임금으로 임명한 왕의 아우야. 형의 죽음을 두 눈으로 봤으니 앞으로 충성하라는 뜻이었어. 그런데 경순왕은 왕건을 믿었거든. 왕에게 견훤은 살인마요 왕건은 보살과도 같았으니까.경순왕이 선왕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왕건은 신하들에게 먼저 조문하도록 하고, 자신은 이듬해 봄에 문상을 왔어.
“서기 924년 음력 2월 19일, 황룡사에서 불경을 풀이하는 백좌(百座)를 열었다. 그와 함께 300명의 선승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친히 향을 피워 불공을 드렸다. 신라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삼국유사의 경애왕 편 기록은 이게 전부. 경애왕에 대해선 삼국사기와 다른 기록들을 섞어찌개로 만들어야 맛이 나지.고대국가의 왕들은 환락으로 밤을 지샜대나. 요
서기 918년, 신라 제54대 경명왕 때의 일이란다. 사천왕사 벽에 그려진 개 그림이 짖어댔지. 솔거의 그림에 새가 부딪쳐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개 그림이 짖는다는 말은 금시초문. 얼마 후 왕건이 철원에서 고려를 세웠다는 소문이 들려왔어.컹컹, 개 그림이 다시 짖었지. 이번엔 무슨 일이 생길지 왕이 잔뜩 긴장했겠다. 유언비어가 나돌 땐 나라에 중대한
“신라 제52대 효공왕 때, 봉성사 바깥문 동서쪽 스물한 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효공왕 편 첫머리부터 불길한 징조가 느껴지지. 효공왕의 성은 김이고 이름은 ‘요’란다, 아버지는 제49대 헌강왕이고. 다음 임금인 신덕왕은 신라 초기 아달라 이사금에서 그친 박씨 왕실을 이은 인물로 알려져 있어. 그렇다면 효공왕은 역성혁명을 당한 인물이었을까. 아니, 그런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때 나라가 어려워졌지. 어느 날, 괴이한 글이 길바닥에 던져진 게야.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 나라가 발칵 뒤집혔지. ‘나무망국’은 머지않아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며,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가리키고, ‘판니판니소판니’는 소판벼슬 두 명이며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신하, ‘부이사바하’는 임금이 미
제49대 헌강왕대에 신라는 건국 이래 가장 잘살았대. 마을마다 기와집이 즐비하여 담장이 맞닿았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나. 날씨마저 좋아 날마다 거리에는 풍악이 울렸겠다. 대왕이 개운포로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올 때 홀연 안개가 끼어 날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어 길을 잃었지. 괴이하게 여겨 물었더니 동해용의 조화라나. 나쁜 일은 좋게 풀어야 한다잖아. 왕이
김응렴, 열여덟에 대표화랑이 되었지. 헌안왕이 그를 궁궐에 불러 잔치를 베푼 때가 응렴의 나이 스물. 왕은 그를 사위로 삼고 싶었어. 응렴은 예쁜 둘째 공주가 마음에 들었으나 스승 범교사가 맏공주와 혼인하면 행운이 있을 거라고 해서 그대로 따랐지. 맏공주와 혼인한 석 달 뒤에 헌안왕이 운명했고, 응렴은 신라 제48대 경문왕이 된 거야. 그런데, 왕의 귀가
신라 제45대 신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궁파(장보고)에게 말했지. “나(김우징)에겐 세상을 함께 할 수 없는 원수가 있소. 그를 없애준다면 내가 왕이 된 다음에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으리다.” 궁파는 약속을 다짐받고 거사를 치르겠다고 했어. 군사를 일으켜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시해하니, 김우징이 왕이 되었지. 왕이 궁파의 딸을 비로 삼으려 했지만 병이
신라 제42대 흥덕왕은 826년에 왕이 됐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당나라에 갔던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와 흥덕왕에게 바쳤어. 흥덕왕은 앵무새를 정성을 다해서 키웠더랬지.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암컷이 아파하더니 시들시들 죽고 말았어. 홀로 남게 된 수컷은 하루하루 슬피 울었지. 왕이 주는 먹이도 마다하고 종일 울기만 했겠다.
신라 제40대 애장왕 9년인 서기 808년, 한가위에 눈이 내렸대.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갔지. 나라가 망할 징조다. 임금이 덕이 없어 하늘이 노했다. 때 아닌 가을에 눈이 오니 이러쿵저러쿵. 가을에 눈이 오니 얼마나 신기했겠어. 첫눈이 일찍 오면 기분도 좋고. 근데, 망할 징조라니? 애장왕은 근심에 휩싸였지. 하늘의 조화를 임금 탓으로 돌리는 건 무슨 꿍꿍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 때 김경신은 상대등 김주원의 아랫자리에 있었지. 어느 날, 복두를 대신해 흰 갓을 쓰고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지. 점을 쳐보니,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우물 속으로 들어간 건 옥에 갇힐 징조라고 하네. 경신은 겁이 나서 두문불출했지. 아찬 여삼이 찾아와서 근심을 묻
신라 제36대 혜공왕은 여자로 날 운명인데 남자로 태어났대. 아버지 경덕왕이 하늘의 명을 어겼거든. 속칭 트랜스젠더로 태어난 게지. 필자가 초등학생일 때 그런 선배가 있었어. 친구들과 모여서 “우우, 반가시나 저기 간다” 하며 놀려댔지. 그 선배에겐 얼마나 뼈아픈 말이었겠어. 이런 ‘흑역사’를 먼저 고백해야 오늘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고대의 역사는 왕이
신라 제35대 임금은 경덕왕. 왕이 삼월 삼짓날, 위엄과 풍모를 지닌 승려를 데려오라고 했지. 마침 길을 가던 한 고승을 신하들이 데리고 가자 왕은 이런 승려가 아니라며 돌려보냈어. 한길에서 누더기를 입고 삼태기를 진 승려를 찾아내니 왕은 기꺼이 맞아들였지. 그가 삼태기 안에 찻그릇을 넣어 다니던 충담사란다. 해마다 이맘때 남산 삼화령 미륵에게 차를 끓여
“도를 도라고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참 이름이 아니다”라는 도덕경의 첫 구절. 저마다 제가 옳다고 부르짖는 세상은 참되게 돌아가지 않는 법. 이게 바른 것이라고 하면 저게 옳은 것이라 하고, 저것이 좋다고 하면 이것이 낫다고 하는 세상은 요지경이야. 그 대상이 재산이나 권력, 이성을 두고 다투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기도 하지. 서기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길이었어. 일행이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지. 동해안의 절벽바위 위엔 철쭉꽃이 피었겠다. 어여쁜 수로부인이 그 꽃을 꺾어 달라는데,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었지. 그때 암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다가왔어. 시를 한 수 읊더니, 절벽을 기어올라 꽃을 꺾어 바치거든. 이때 부른 노래가 향가인 헌화가(獻花歌)란다.“자줏빛
신라 제33대 임금, 성덕왕. 왕이 된 지 5년째인 706년에 흉년이 들었어. 민심이 사나워지자 이듬해에 궁궐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줬지. 식구 한 명에 하루 서 되씩, 모두 삼십만 오백 석을 배급한 거야. 왕은 또 삼국통일에 공이 큰 무열왕을 기려 봉덕사를 세우고, 칠일 간 인왕도량을 열고, 많은 죄수를 풀어주었지. 백성이 주릴 때도 궁궐은
신라 제32대 효소왕 때 득오는 죽지랑이 이끄는 화랑 중 한 사람이었어. 득오는 집에서 나다녔는데 한 번은 열흘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지. 죽지랑이 득오의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모량부의 아간 익선이 부산성 창고지기로 데려갔다고 하거든. 죽지랑은 제자들과 함께 술을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