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리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은 최초의 울산사람들이 남겨놓은 문명의 흔적이다. 울산의 문명은 그렇게 태화강의 상류에서 시작됐다. 대곡천에서 고래를 잡기 위한 다양한 기술(문명)을 개발·전파했던 그들은 정착생활이 가능해지면서 더 넓은 하천을 따라 태화강 본류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오늘의 울산을 만들었다.

 울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구석기 유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언양읍 다개리와 무거동 옥현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기 때문에 울산지역에서도 구석기시대 유적이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신석기시대에는 울산의 해안선을 따라 사람이 살았다. 흔적으로는 황성동 세죽유적과 우봉리유적, 신암리유적 그리고 성암동패총 등을 들 수 있다.

 본격적으로 태화강가에 사람들이 몰려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로 볼 수 있다. 청동기 주거지는 현재 울산의 전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무거동 옥현, 웅촌면 검단리, 다운동, 연암동, 화정동, 야음동, 온양읍 대안리, 천상리 등에서 주거지 또는 경작지 등이 발견됐다.

 삼한 때는 마한, 진한, 변한 중 진한에 속하는 울산지역에는 우시산국과 굴아화촌이 있었다. 우시산국은 웅촌 일대로 회야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국가이지만 파사왕대에 신라에 편입된 굴아화촌은 현재의 굴화주변, 즉 범서와 다운동, 태화동 일대로 태화강가 형성된 부족국가인 것이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면서 북구 중산동, 중구 다운동, 울주 양동리, 울주 조일리, 동구 일산동 등지로 문명권이 넓어졌고 고려말에 이르러 왜구의 침임에 대비해 읍성을 쌓는 등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태화강을 중심으로한 현재의 도시형태가 이 때 조성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훗날 우리나라 산업의 견인차가 됐던 울산의 문명은 그렇게 태화강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명은 강을 끼고 발달한다. 물은 인간의 원천이다. 세계 4대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 사이의 땅"이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황하문명은 황하강을 끼고 발달했다. 태화강은 곧 울산의 문화요, 울산 사람은 태화강 사람이다.

 물줄기를 거스를 수 있을 만큼 문명이 발달하면서 문명의 발상지로서 강의 의미는 점점 퇴화되어 갔지만 그 상징성은 오늘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박맹우 울산시장은 "태화강의 수질은 울산의 경제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의 척도"라며 "태화강 수질을 3, 4급수로 유지하면서 국제도시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태화강은 발음이 센 울산토박이에게는 "태홧강"이었다. 표준어를 사용하는 외지인과 태화강의 낭만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만 태화강이라고 바른 발음을 할 뿐이다. 어느 시인은 태화강은 있어도 "태홧강"은 없어졌다고도 말했다. 토박이들의 머리 속에 있는 "태홧강"의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서정적이다. 눈이 부실 만큼 흰 모래로 뒤덮인 백사장이 있고 가을이면 갈대가 흐느적 거렸다. 강 가운데로 삼각주가 길게 발달해 물은 두갈래로 갈라지면서 앞강, 뒷강이 되어 더욱 낭만적으로 흘러갔다. 해질녁 강을 따라 길게 노을이 퍼지면 그야말로 한편의 그림이고 서정시였다. 울산 토박이들에게 있어 태화강은 생명이요, 청춘이요, 생활이요, 놀이터였다.

 강물은 흘러 너른 삼산들을 언제나 풍요의 땅으로 만들었고 길게 이어진 "대보둑"이라 불리던 제방과 강변을 뒤덮고 있던 갈대밭은 청춘남녀의 데이트 장소였다. 강물은 곧바로 식수로 이어졌음은 물론이고 임금에게 진상됐던 은어잡이, 양정동 치전마을 앞에서 대통으로 잡아올렸던 뱀장어, 산란 때 담수를 찾아 강으로 올라오던 황어, 삼산 뒤편의 조개잡이, 투망으로 잡은 숭어, 용금소의 잉어 낚시, 창으로 찔러 잡던 연어잡이는 생활이자 놀이이고 추억이다. 백사장은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장소였다. 씨름이며, 줄당기기며 울산의 대동놀이는 모두 태화강 백사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업화의 깃발과 함께 백사장도, 갈대밭도, 앞강도, 뒷강도, 대보둑도 모두 없어져 버렸고 태화강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최근들어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태화강의 수질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태화강은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그래서 토박이들은 이들이 모두 사라진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앞강·뒷강을 이야기할 때면 목울대가 먼저 차오른다. 태화강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울산사람들의 정신이다. 태화강은 울산 문명의 척도이자 문화의 뿌리다. 글=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사진=서진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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