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그의 피부는 검다 그도 한때 남부럽지 않은

푸른 몸의 빛나는 광휘를 지닌 적이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가혹한

시간의 시련을 그 또한 벗어날 재간은 없었다

검은 피부는 지나온 생의 무늬일 뿐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하루의 팔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는

긴 항해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낡고 지쳐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사랑에 노소는 없다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젊은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벌들 보라

집 앞 동천강 둑길에는 한때 달맞이꽃이 장관이었다. 머나 먼 칠레에서 시집와 여름철 달밤이면 원색의 노란 그리움으로 강둑을 온통 물적시곤 했었다. 그런데 10년 터줏대감 아카시아조차 모화에서 몰려오는 된바람에 속수무책이던 십이월 어느날 그녀들을 경이로움으로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천곡의 들녘이 생의 절정을 지나 몸 낮추고 낮추어 바야흐로 겸허의 순간을 맞고 있던 그때, 유독 달맞이꽃 몇 그루가 늙은 물관부 끝에 청푸른 잎사귀들을 달고 희맑은 꽃 서너 송이까지 싱싱히 물고서 매운 한풍과 놀고 있었던 것이다.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이 뽑아 올린 그 '둥글고 환한 젊은 꽃' 위로 얼마 전 열렸던 어느 실버 박람회장을 가득 메우던 노숙한 젊음들을 얹어본다. 참나무의 불티는 흔적이 없다. 탈대로 다 타버리기 때문이다. 황혼이 붉은 것도 인생을 그처럼 끝까지 불태우라는 조물주의 계시다. 그러고 보면 그곳에 모였던 실버들은 모두 거룩했으며 '둥글고 환한 젊은 꽃'들이었다.

안성길 시인·창원대 국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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