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울주군 언양의 양반사회는 언제부터 형성됐을까.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이종서 교수(사진)는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논총> 제24집에 실은 '울주군 정씨가 소장 고문서 분석'에서 이에 대한 답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해 9월 첫 공개된 정씨 가문의 홍패(紅牌)와 교첩(敎牒)을 해석하고 분석한 이 논문에서 대략 18세기 중엽부터 언양에 사족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추론한다.

1766년 영조의 명을 받아 이조(吏曺)에서 발급된 이 홍패와 교첩은 병자호란 당시 의병으로 전투에 참전해 쌍령(雙嶺) 전투에서 전사한 정대업(鄭大業·~1637)을 호조좌랑에 추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교수는 정대업의 증손 정래영(鄭萊榮)이 1756년부터 유생 서모씨의 권유로 증조부 정대업을 순절신(殉節臣)으로 인정받기 위해 10년간 동분서주한 과정을 따라가며 이 시기에 언양에도 양반사회가 태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 교수는 "병자호란 뒤 순절신에 대한 포상은 그 지역 사족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후손들이 지방 사족사회에서 확고히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며 비교적 부유했던 정씨 가문이 전쟁이 끝난 뒤 20년이 지나 조상의 순절신을 인정받으려 한 점과 언양의 사족들이 연명해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한 점을 근거로 "이 무렵 스스로를 사족으로 자각하는 일군의 가문이 언양 지역에 형성되어 결속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조선에서 사족은 법제적 신분이 아니라 관습적인 신분이었으므로 사족의 형성 시기와 정도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울산 호적에서 사족 직역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는 시기가 18세기 중반이라는 최근의 연구도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이 논문에는 이와 함께 정대업의 유서, 정래영과 언양협 사족이 제출한 청원서, 언양현감이 순찰사에게 보낸 첩보, 정대업의 무과급제 홍패, 손자 정이원 남매의 분재기 등을 해석해 원문과 함께 소개했다.

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이정일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퇴임을 기념해 펴낸 이번 <인문논총>은 임진왜란 당시 칠천량전투에서 패해 무능한 장수로 오해받고 있는 원균을 재조명한 이정일 교수의 '임진 해전의 용장 원균'을 비롯해 전호태 교수의 '웅녀의 동굴, 유화의 방-신화 속 두 세계의 접점', 김상옥 교수의 '허먼 멜빌과 악의 문제' 등 12편의 논문을 실었다. 서대현기자 sdh@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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