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동은 옛 울산의 요람지(搖籃地)로 출발했다. "북정"의 어원은 마을 전체가 소나무 숲 속에 있는 것이 마치 반송(盤松)들 가운데의 정자(亭子)처럼 보였기에, "부(府) 북쪽의 정자마을"이라 불린 것에서 유래한다.

 북정동에 군치(郡治: 군청 소재지)가 들어선 후로 관아가 신축되고 주변에 서리(胥吏)와 상인들이 굴화, 병영 등지에서 대거 이주하였다. 상가와 시장이 형성되고 생선 소금 농산물 포목 도자기 등의 물물교환이 성행하여 영문(營門)이 있는 병영동과 함께 백 수십 호 규모로 커져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인구 밀집지역인 이 곳에는 고읍성(古邑城)이 있었다. 우왕 5년(1379)에 왜적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군수는 힘없는 백성들을 제쳐두고 아전과 식구만 거느리고 계림성(경주)으로 달아났다. 경상도 안렴사(按廉使) 이문화가 와보니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사슴이 떼 지어 놀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에 충격을 받고 경주부윤 박위를 찾아가 "어릴 때 가친을 따라 왔을 때는 화려하고 번성하더니 이제는 쓸쓸하여 탄식만 날 뿐이오. 백성을 모아 무슨 계책을 세워보려 하오"라고 말하니, 박위는 "적을 방어하는 방법이 옛날과 달라져서 적이 바다 가까운 곳에만 닥치는 것이 아니고 어디든지 침입해 오니, 백성을 먼 곳으로 옮기려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소"라고 말했다. 이문화가 그의 말을 듣고 백성을 일으켜 토역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공시켰다.

 당시의 전투 양상은 창칼보다 활이 주무기였으므로 해안가가 아니라도 흙 담 성안에 피난하여 궁사들의 응전으로 적을 물리칠 수가 있었다. 바닷가에 축성하지 않은 것은 적선의 출현을 발견하면 적이 이르기 전 주민들의 피난에 시간의 여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만약 옥교동이나 괴뱅이 고개 너머에 성을 쌓았을 경우, 왜구의 배들이 장생포 앞바다에 침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리 서둘러 군민을 동원하여 옥교동으로 피신하더라도 이미 적선은 한발 앞서 태화루를 지나 굴화로 치달을 것이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에 대책 없이 피난만 간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략으로서 치고 빠지는 집단응전의 노련한 전술이었던 셈이다. 왜구들의 허를 찔러 무력화시키는데 웅장한 석성까지 필요 없었다. 몸을 일단 피신시킨 연후에 다시 돌아서서 신속히 반격할 수 있는 적당한 높이의 흙성이면 족했다. 북정동의 읍성(邑城)이 단순히 피난성(避難城)이 아니라 해안방어의 요충지로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북정동의 토성은 왜적의 공격루트를 미리 간파하고 우리 땅의 지형지물(地形地物)을 이용하여 주민의 손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손자병법의 실천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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